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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석의 詩로 여는 주말]‘내가 죽어보는 날’

입력 | 2013-05-18 03:00:00


인천 용화선원 송담 스님의 선화(禪畵).

내가 죽어보는 날’
조오현(1932∼)

부음을 받는 날은
내가 죽어보는 날이다

널 하나 짜서 그 속에 들어가 눈을 감고 죽은 이를
잠시 생각하다가
이날 평생 걸어왔던 그 길을
돌아보고 그 길에서 만났던 그 많은 사람
그 길에서 헤어졌던 그 많은 사람
나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
나에게 꽃을 던지는 사람
아직도 나를 따라다니는 사람
아직도 내 마음을 붙잡고 있는 사람
그 많은 얼굴들을 바라보다가

화장장 아궁이와 푸른 연길,
뼛가루도 뿌려본다

    
    
그제 본보 1면에 실린 조오현 스님 인터뷰를 찬찬히 읽었다. 팔만대장경의 내용을 줄이면 ‘남의 눈에서 눈물나게 하지 마라’ ‘사람 차별하지 마라’는 거다.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서 윤회를 받는다고 생각해 한 순간 한 순간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라. 부처가 바라는 세상을 이루는 길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 남편 아내 직장동료를 부처님으로 여기는 거다…. 어리석은 나 같은 중생도 단박에 알아들을 수 있게 풀어준 깨달음의 말씀들이다.

시(詩)는 가장 간결한 글이며 말(言)의 사원(寺)이라 했던가. 오현 스님은 2007년 ‘아득한 성자’로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이기도 하다. 불교적 상상력과 간결한 언어를 압축한 그의 시와 시조는 오도(悟道)의 세계를 정공법으로 파고든다.

‘우리 절 밭두렁에/벼락 맞은 대추나무/무슨 죄가 많았을까/벼락 맞을 놈은 난데/오늘도 이런 생각에/하루해를 보냅니다.’ (‘죄와 벌’) ‘그 옛날 천하 장수가/천하를 다 들었다 놓아도/한 티끌 겨자씨보다/어쩌면 더 작을/그 마음 하나는 끝내/들지도 놓지도 못했다더라.’(‘마음 하나’)

한글 선시(禪詩)처럼 오묘한 삶의 이치와 통찰을 문학의 형식으로 표현하는 스님은 ‘내가 죽어보는 날’에서 우리가 접하는 일상의 부음을 화두로 법문을 한다. 타인의 죽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듯 우리 자신의 죽음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대하는 경지를 일깨운다. 삶과 죽음이 원래 하나인데 굳이 경계를 나누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분별심을 돌아보라 이른다.

이 시를 보면서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췌장암 진단 1년 후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한 연설이 자동적으로 떠올랐다. 전도유망한 젊은이들을 앞에 두고 그는 “죽음이 인생에서 가장 멋진 발명품”이라며 “죽음 앞에선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 남는다”는 말을 남겼다. 그는 “내가 곧 죽는다는 생각은 인생에서 큰 결정을 내릴 때 도움을 준 가장 중요한 도구”라고도 했고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당신이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이라고도 했다. 인류의 삶을 뒤바꾼 첨단기업을 일궈낸 인물의 생각은 돌고 돌아 2500년 전의 첨단 세계관이었던 부처의 마음과도 닿아 있는 것인가.

‘부처님 오신 날’ 황금연휴를 맞아 고속도로는 꼭두새벽부터 쓰나미처럼 밀려든 차로 분주했다는 소식이다. 어디로들 가는 순례길일까. 전국의 스님들도 바쁜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불교계에서는 평생을 수행에만 전념한 송담 스님을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선지식(善知識·수행자들의 스승)으로 꼽는다. 기교 대신 수행의 내공이 묻어나는 그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불경 대신 다시 오현 스님의 시를 읽어본다. 시를 시시하게 보는 시절에 여느 설법 못지않은 사자후로 가슴을 때린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