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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업에 다시 날개를]11∼30대 그룹 심층 설문조사

입력 | 2013-05-20 03:00:00

11~30위 그룹 “불황-엔저-경제민주화에 투자 엄두 못내”




“지금 투자를 늘리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대통령이 하란다고 무조건 늘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수 침체와 글로벌 경제 위기로 버티기도 힘든데 정치권은 계속 기업을 옥죄기만 하니….”

동아일보가 국내 11∼30위 그룹을 대상으로 실시한 심층 설문조사 결과 대기업들은 현재의 경제 상황이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달 초 제1회 무역투자진흥회의를 주재하며 기업의 투자를 독려하기 위한 정책을 내놓았지만 현장의 반응은 아직 썰렁하기만 하다.

○ 15곳 중 1곳만 투자 확대 검토


설문에 응한 15개 그룹 가운데 현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전 분기 대비 경제성장률이 8개 분기 연속 0%대에 머물고 있는 것은 과거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위기 상황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토로했다. 지금까지 한국경제의 분기별 1% 미만 성장률은 2004년 카드사태와 1979년 2차 오일쇼크 이후 5개 분기 연속이 최장 기록이다. 1997년 외환위기 때도 3개 분기 연속에 그쳤다. 주요 그룹 관계자들은 “지금은 위기경영의 고삐를 죌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추가 투자를 검토하는 그룹은 한 곳에 그쳤다. 5곳은 연초에 세운 투자계획 보류를 검토 중이다. 한 곳은 일부 사업을 정리하는 구조조정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신세계그룹은 백화점과 이마트 신규 점포 개장 계획을 전면 중단했다. 동부 등 건설사업 비중이 높은 그룹은 주택사업, 개발사업을 최소화하고 있다. 한국실리콘에 2000억 원 넘게 투자한 에쓰오일은 손실을 떠안은 채 투자 중단을 선언했다.

○ 불확실한 정책, 경제민주화 규제도 발목

주요 그룹은 투자를 주저하는 이유로 △민간 소비 위축 등 내수 침체 △글로벌 경제위기 여파 △엔화 약세 등 수출 환경 악화를 꼽았다. 이에 더해 규제 중심의 경제민주화 입법과 정부의 불확실한 산업정책도 악재라고 입을 모았다.

국내 태양광 선두 업체인 OCI는 최근 전북 군산시에 지을 예정이던 폴리실리콘 제4, 5공장에 대한 투자(약 3조4000억 원)를 미루겠다고 공시했다. 태양광 산업은 유럽 각국의 보조금 축소와 중국 업체들의 대량생산으로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이렇다할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OCI 관계자는 “최근 관련 업체가 잇달아 도산하자 금융 당국이 금융회사에 태양광 여신을 잘 관리하라고 지시해 태양광 업계의 돈줄이 오히려 막혔다”고 말했다. 비올 때 우산을 뺏는 무책임한 행태라는 하소연이다.

해운업계도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글로벌 해운업체들은 경기가 회복될 때에 대비해 선박을 값싸게 건조할 수 있는 지금 대형 선박에 발 빠르게 투자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상선 관계자는 “우리를 포함해 국내 선사 중 어떤 회사도 최근 대형 선박을 발주했다는 얘기를 못 들어 봤다”며 “저성장에 따른 투자심리 축소와 정부의 지원정책 실종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업의 비용을 초래하는 경제민주화 입법들도 투자의 걸림돌이라는 견해가 많았다. 60세 정년 연장, 대체휴일제 등이 대표적이다. 반(反)기업 정서도 큰 부담이다. 동부그룹은 경기 화성시에 아시아 최대 규모의 첨단 유리온실을 지어 수출용 토마토 생산에 나섰지만 농민들의 반대로 3월 사업을 접었다.

○ 방치 땐 일본식 장기 불황 불가피

하나금융경영연구소는 최근 ‘장기 저성장 대응’ 보고서에서 국내 경제의 잠재성장률 하락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지는 근본 원인이 기업의 고정투자 부진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연구소는 “최근 10년간 고정투자 증가율이 연평균 1.6%에 불과해 성장잠재력을 훼손했다”고 밝혔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일부 기업을 뺀 대부분의 한국 기업은 이미 실적 악화, 투자 축소, 경쟁력 저하로 이어지는 역성장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반면 일본 기업들은 정부 지원을 약속한 아베노믹스 등의 영향으로 최근 투자를 점차 늘리고 있다. 도시바는 올해 반도체 투자를 전년의 두 배 수준으로 늘리겠다고 했다. 혼다도 올해 멕시코 공장에 4억7000만 달러를 투자하는 계획을 포함해 전체 투자를 전년 대비 18% 늘리기로 했다. 이에 따라 미쓰비시전기 등 장비 업체들의 올 3월 수주는 전달보다 증가하는 등 투자 확대 효과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김용석·강홍구·박창규 기자 nex@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