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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필리핀 분쟁 뒤엔… ‘하나의 중국’ 딜레마

입력 | 2013-05-20 03:00:00

필리핀 정부가 사과하면 中원칙 훼손… 比대통령 개인자격 사과에 대만 거부
中이 사과 요구하면 대만 반발 불보듯… 중국 외교부 관계자 “잠이 안 온다”




어민 피격 사망 사건으로 촉발된 대만과 필리핀 간 분쟁의 이면에는 ‘하나의 중국’ 원칙이라는 미묘한 사안이 깔려 있다. 중국은 이번 사건이 출구를 찾지 못하게 된 원인을 제공함과 동시에 자칫하면 양측 갈등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19일 주요 외신에 따르면 자국 어민 사망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필리핀을 방문했던 대만 조사단이 아무 성과 없이 전날 귀국했다. 천원치(陳文琪) 조사단장은 “(조사에 협조해야 할) 필리핀 측에 진정성과 신뢰성이 없었다”고 비난했다. 필리핀 법무부는 “필리핀은 주권국가이기 때문에 대만의 공동조사 요구에 응할 수 없다”고 했다. 대만은 노동력 수입 동결 등 이미 실시 중인 11가지 보복 조치에 더해 추가 제재를 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이번 사건이 정부 간 대치 상황으로 비화한 것은 중간에 중국이 끼어 있기 때문이다. 필리핀은 1975년 6월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한 이후로 외교적으로 ‘하나의 중국’이라는 중국 측 주장을 수용해 왔다. 베니그노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이 대만 어민이 사망한 지 엿새가 지난 15일 정부 수반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사과(personal apology)한 것도 대만을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국가 차원의 사과를 하려면 중국에는 할 수 있지만 논리적으로 지방정부인 대만에는 불가능하다는 견해다.

물론 필리핀으로서는 총선(13일)이 끼어 있었던 당시 상황에서 대만에 무조건 고개를 숙일 수 없기 때문에 ‘하나의 중국’ 원칙을 교묘히 이용한 측면도 있다. 대만은 이 사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즉각 제재 발동에 나섰다.

중국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르면 대만 어민도 중국 국민이다. 피격 사망 사건에 당연히 개입해야 하지만 필리핀에 대해 중국 정부에 직접 사과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만 국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를 의식한 듯 대만 행정원 대륙위원회는 16일 “중국은 대만-필리핀 문제에 끼어들지 말라”고 선을 긋고 나섰다.

그렇다고 이번 사안에서 대만이 국가로서의 목소리를 높이는 과정을 마냥 지켜만 볼 수도 없다. 사건의 진행 경로와 결과가 다른 나라의 대중(對中), 대(對)대만 외교에 미칠 파장을 감안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변국이 대만을 국가로서 인정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외교부 당국자들은 주변에 “이 일로 잠이 안 온다”며 당혹스러움을 호소하고 있다고 한다.

앞서 2011년 2월에도 필리핀이 대만인 사기 용의자 14명을 체포해 대만이 아닌 중국으로 추방한 바람에 대만과 중국, 필리핀 간 갈등이 불거진 적이 있었다. 당시 중국이 서둘러 용의자 14명을 다시 대만으로 보낸 덕에 사건을 덮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만이 군사훈련까지 하는 등 상황이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어 중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어떻게 지켜낼지가 관심사로 대두됐다.

베이징=고기정 특파원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