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싱하고 딴 곳엔 없으니까” 대형마트보다 비싸도 장사진
생산과 유통이력이 투명하게 공개되는 농산물을 선호하는 소비자가 늘면서 미국 파머스마켓이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파머스마켓에선 엄격한 친환경 규정을 지킨 농민과 상인만이 물건을 팔 수 있다. 11일 샌프란시스코 페리플라자 파머스마켓에서 손님들이 싱싱한 야채를 고르고 있다. 샌프란시스코=김창원 기자 changkim@donga.com
“대형마트에선 구할 수 없는 우리만의 특별함을 팝니다.”
미국 전통시장 상인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월마트’ 같은 현대식 대형마트가 전혀 문제될 게 없다는 당당한 자신감이었다.
파머스마켓 부활은 미 서부의 캘리포니아가 주도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의 파머스마켓은 729개로 전체 파머스마켓의 10%가량 된다. 이 가운데서도 로스앤젤레스(LA) ‘길모어 파머스마켓’과 샌프란시스코 ‘페리플라자 파머스마켓’은 대표적인 ‘명품 전통시장’으로 꼽힌다.
○ ‘싸구려로 승부하면 대형마트에 필패’
“1934년 시장이 문을 연 이래 한 번도 상인과 손님의 흥정 소리가 끊어진 적이 없었지요. 2001년 9·11테러가 났을 때조차 침묵이 흐른 건 단 2분이었어요.”(1937년 개점한 아이스크림 가게 주인)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흔한 물건을 떼다 팔았다면 힘들었겠죠. 우리는 이곳에서만 살 수 있는 특별함(specialty)을 팝니다.” 22년째 이곳에서 스티커를 팔고 있는 ‘스티커 플래닛’ 사장인 리처드 크래프트 씨의 설명이다. 창업 2세대인 크래프트 씨는 누나와 함께 이곳을 경영하고 있다. 포장마차 정도의 넓이에 직접 제작하거나 미국 전역에서 조달한 진귀한 스티커 5000종이 가득했다.
“이곳에서 스티커를 산 아이들이 커서 자신의 자녀들과 다시 찾아요. 수십 년 전 기억을 자식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 건 우리만 제공할 수 있는 ‘또 다른 상품’이지요.”
세계의 매운맛을 모두 맛볼 수 있다는 ‘라이트 마이 파이어’의 민영욱 사장(여·재미교포)은 17년 전부터 세계 각국에서 조달한 1200여 종의 핫소스만 팔고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60대 여성 관광객은 “오스트리아 여행 책자에도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 곳”이라며 “세계 어디서도 이처럼 다양하고 희귀한 핫소스를 모아놓은 곳을 찾기 힘들다”며 신기해했다.
시장을 돌다 보니 금세 눈에 띄는 한 가지를 발견했다. 대를 이어 장사를 하는 가게가 유독 많다는 점. 점포 1개당 평균 영업기간이 20년을 넘는다. 79년째 땅콩버터를 만들어 팔고 있는 ‘매기스 너트’의 종업원 드웨인 콜 씨는 “우리는 화학첨가물을 전혀 넣지 않고 옛날 방식으로 만든다”며 “그 맛을 잊지 못해 미국 전역에서 주문이 들어온다”고 자랑했다.
○ “소비자는 ‘얼굴 있는 상품’을 신뢰한다”
샌프란시스코 1번 부둣가의 여객터미널인 페리플라자. 1992년부터 이곳에선 매주 화, 목, 토요일에 미국에서 최고로 맛있는 채소와 과일을 판다는 ‘페리플라자 파머스마켓’이 선다. 초고층 빌딩 숲에 인접한 곳에 간이 천막을 펴놓고 4시간씩(토요일엔 6시간) 반짝 장이 선다. 이 시장의 운영조직인 CUESA에 따르면 1주일 평균 고객 수가 3만 명, 등록 점포 수는 120여 개에 이른다.
9일 점심시간을 이용해 장을 보러 나왔다는 재미교포 앤절라 신 씨는 “항상 여기서 채소와 과일을 구입해 회사 냉장고에 보관했다 집으로 가져간다”고 했다. “대형마트보다 비싸지만 몸에 좋고 맛도 좋은 제철음식을 살 수 있기 때문”이란다.
실제로 페리플라자 파머스마켓에서 파는 과일과 채소는 모두 샌프란시스코 주변의 농민들이 유기농법으로 생산한 것이다. 쇠고기나 닭고기, 계란도 항생제 등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방목으로 키워 얻었다.
“일반적으로 미국에서 채소나 과일이 식탁에 오르려면 평균 2400km를 이동합니다. 하지만 여기 제품은 인근에서 당일 수확한 것으로 평균 이동거리가 160km 이내입니다.”(데이브 스톡데일 CUESA 총책임자)
여기서 판매 자격을 얻으려면 까다로운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20쪽 분량의 생산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고 친환경 기준을 3년 연속 통과해야 한다. 유기농의 경우엔 공인 인증기관으로부터 해마다 감사를 받아야 하고 인증 수수료도 내야 한다.
점포마다 ‘우리는 이렇게 만들었어요’라고 쓴 간판을 달아 소비자와 소통하려는 노력도 돋보였다.
스톡데일 CUESA 총책임자는 “미국 소비자들은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는 대형마트의 상품보다 생산과 유통 이력을 알 수 있는 ‘얼굴 있는 상품’을 선호한다”며 “파머스마켓은 이런 소비성향의 변화를 빠르게 포착해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 파머스 마켓(Farmers market) ::
미국의 전통시장. 본래 농민들이 직접 재배한 채소와 과일을 내다 파는 소규모 비상설 시장이었으나 최근에는 농축산물뿐만 아니라 빵 치즈 소시지 등 1차 가공 식품과 공산품 등 다양한 제품을 파는 상설시장으로 변하고 있다. 건강과 자연에 대한 소비자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마켓 수가 해마다 평균 10%씩 빠르게 늘고 있다.
LA·샌프란시스코=김창원 기자 chang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