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 돕는건 당연… 감정 휩쓸려 ‘균형’ 잃으면 되레 부작용”
동아일보 독자위원회는 20일 본사 회의실에서 ‘갑을 관계, 어떻게 봐야 하나’를 주제로 토론했다. 왼쪽부터 김사중 스탠더드에디터, 박태서 미디어연구소장, 이주향 위원, 이진강 위원장, 김동률 위원, 박제균 스탠더드에디터, 이형삼 스탠더드에디터.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갑의 횡포, 을의 반란 얘기가 요즘 화제입니다. 예를 들면 ‘라면 상무’ 사건, 모 제과업체 회장의 지갑 폭행 사건에 이어 남양유업과 배상면주가의 대리점 밀어내기 파문이 연이어 발생했습니다. 그동안 참고 견뎠지만 이제는 가만있지 않겠다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더욱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파급력에 힘입어 ‘한 번 걸리면 죽는다’는 식의 분위기가 형성됨에 따라 대기업 등 이른바 강자들도 몸을 사리고 있습니다. 때맞춰 박근혜정부의 경제민주화 논의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한 언론 보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언론이 놓친 것은 무엇이 있는지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진강 위원장=언론이 한쪽으로 방향성을 정해두고 갑을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갑을의 문제를 무비판적으로 선동적으로 써오는 것을 그대로 받아서 언론이 보도하는 점도 보여 걱정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갑을 관계의 본래 의미는 뭐고 이를 책임 있게 전달할 언론에서는 어떻게 정리를 해서 독자들에게 알려줘야 하는지 논의를 해보도록 하죠.
이주향 위원=영원한 갑도 을도 없습니다. 공무원은 말단이어도 갑입니다. 특히 인허가권을 가지고 있으면 더 그렇죠. 장관을 지내신 원로학자 말씀이 국회의원 없으면 장관 할 만하다고 합니다. 장관은 의원 앞에 서면 을이죠. 의원들은 또 표를 주는 유권자들에게는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개인들이 갑의 상황이 되면 어떻게 권력을 남용하는지 여기서 단서가 나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갑을 문화가 강화 또는 왜곡되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마름입니다. 소작농과 지주가 있고, 그 가운데 마름 계층이 있는데 소작인 중 약삭빠른 사람들이 주로 마름을 합니다. 갑은 마름의 생존을 해결해 주고 자기의 이해관계를 마름한테 넘기며 뒤로 빠집니다. 여성 시대가 이렇게 빨리 오리라고 아무도 예측 못했습니다. 몇백 년간 을로 있던 여성이 갑이 되면서 을의 반란이 중요한 화두가 된 측면도 있습니다.
김동률 위원=반란이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을의 ‘정당한 요구’가 적합하지 않을까요. 국회 청문회에 출석하지 않은 대기업 회장이 1000만 원 벌금을 내고 면죄부를 받는 것은 적절한 징벌체계가 아니라고 봅니다. 을의 정당한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고쳐야 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위원장=갑을의 문제를 우열의 관계로만 생각하니 반란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처음부터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있었죠. 갑을 관계를 단순히 우열의 문제로만 따지지 말고 당사자 관계로 생각을 바꿔봅시다.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는 누가 개입을 안 해도 좋지요. 대등하지 않은 당사자 관계에서는 제3의 힘이 개입해야 합니다. 법률적으로도 강한 사람에 대해서 권리를 제한하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을에 대해서 보호책을 강구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게 진정한 갑을 관계입니다. 우월적 관계에 있는 갑을만 따지다 보니 을은 도와줘야만 하는 쪽으로 편향적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공정거래 제도가 왜 있고, 노동관계법이 왜 있을까요. 그것은 우월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 힘을 써서 남용을 할 것 같으니 제어하기 위해서 만듭니다. 함께 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갑을 관계입니다. 긍정적인 개념으로 봐야 된다고 봅니다. 양자 관계가 나쁜 개념으로 가서 대문짝만 하게 다룰 것은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언론 등에서 사건의 핵심을 간과하는 게 있습니다. ‘라면 상무’ 사건은 평소 생각이 잘못된 사람이 야기한 해프닝입니다. 왜 갑을 관계로 포장하는가 의문입니다.
박 스탠더드에디터=언론이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기사를 쓰다 보면 약자와 강자가 있기 마련인데 이번엔 갑을이라는 말의 트렌드로 보자기를 씌운 측면이 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를 그냥 갑을로 써버리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이 위원장=남양유업과 배상면주가처럼 강한 공급자와 대리점의 문제는 뭐가 잘못되었나를 구조적으로 따져봐야 합니다.
김 위원=지하철역에 설치된 에스컬레이터를 보면 어떤 역은 양쪽으로 24시간 가동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어떤 곳은 노인들이 계단을 기어 올라가다시피 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 사회가 갑을 위한 구조로 돼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 위원장=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은 세 들어 사는 사람이 경제적 약자니까 보호해 주자는 게 취지였죠. 세입자를 지나치게 보호하면 집주인들이 세를 안 주려고 하니 세입자가 오히려 피해를 봅니다. 항상 균형과 적정선이 중요합니다.
이 위원=일각에서는 갑을이라는 말을 아예 쓰지 말자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위원=프랑스 대혁명 때처럼 새로운 계급의 등장은 곧 새 역사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요즘에는 그 물적 기반이 SNS입니다. 앞으로 많이 바뀔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사중 스탠더드에디터=누리꾼들은 이른바 ‘갑의 횡포’에 대해 인터넷상에 분노를 쏟아냈습니다. 비난으로 시작해 사과, 문책, 재발방지책 요구에 이르기까지 내용도 다양했습니다. 대부분 자신도 을이라고 생각하면서 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정치권도 가세해 여야의 법안 발의에서 대통령의 불공정 거래에 대한 경고 발언까지 이어졌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상 털기, 인신 모욕 등과 같은 군중심리는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노출된 문제점에 대해 법과 제도 개선이 뒤따라야 하겠지만 그보다 물질 위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잊고 살았던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가 뿌리내리도록 노력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이형삼 스탠더드에디터=갑을 관계는 흔히 기업 부문에서 발생하는 것 같지만 근원은 우리 사회 모든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기업의 을인 하청기업은 재하청기업에서 보면 갑입니다. ‘만년 을’ 신세일 것 같은 서민들도 마트 백화점 콜센터 같은 데서 근무하는 감정노동자들 앞에선 철저히 갑 노릇을 하려 듭니다. 공무원들은 ‘만년 갑’일 것 같지만 일선에서 주민들을 상대하는 공무원들은 을 신세죠. 수평적 거래 관계를 수직적 주종 관계로 착각하는 비뚤어진 갑을 관계를 바로잡으려면 경제민주화 차원의 제도적 개선책도 필요하지만,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우리 문화와 의식 저변에 대한 탐구와 자성이 더 시급한 것 같습니다.
박 스탠더드에디터=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사회 문화가 결국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배경이라고 생각합니다.
―갑을 관계에서 약자를 돕거나 편을 들어주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균형을 잡아줄 언론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이 위원장=이런 상황을 이용하고 활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당장은 유리할 것 같지만 유리한 게 아니고, 정도로 가는 게 옳은 일이라는 생각들을 가져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갑을은 양과 음 관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이 좋거나 나쁘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오늘 논의한 대로 갑을이라는 것을 대립하는 당사자로 보지 말고 불이(不二)라는 생각을 가지면 갈등구조도 한층 안정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참석자>
● 위원장
이진강 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 위원
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이주향 수원대 교수
박제균 편집국 스탠더드에디터
이형삼 출판국 스탠더드에디터
김사중 동아닷컴 스탠더드에디터
● 사회
박태서 미디어연구소장
정리=김동원 기자 daviskim@donga.com
오혜진 인턴기자 연세대 식품영양학과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