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부지법 ‘암행법관’ 50일 평가
8일 오전 11시. 60, 70대 할머니 수십 명이 서울동부지법 4호 법정을 가득 채웠다. 서울 광진구의 한 경로당에서 온 할머니들이었다. 월 3000원인 회비를 내지 않고 다른 노인들의 회비를 횡령한 전력이 있는 전 회장 박모 할아버지(78)가 할머니들만 40여 명 다니는 이 경로당에 자꾸 출입하려 하자 현 회장 남모 할머니(70)가 낸 출입금지 가처분신청 사건 재판이었다. 변호사나 대리인도 없이 진행된 재판이라 노인들의 자기주장만 반복됐다.
보통 소액이나 간단한 민사재판은 5분 만에 끝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사건 재판부는 30분이 넘는 시간을 이 사건에 할애하며 양측에 충분한 발언 기회를 줬고 사건의 쟁점을 차근차근 정리해줬다. 점차 방청석에서 “맞아 맞아” “그렇지”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박 할아버지는 법정에서 “다시는 경로당에 가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재판부는 할머니 측의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였다.
이 재판은 20일 오후 서울 광진구 건국대 동문회관에서 열린 서울동부지법 법관 세미나에서 소개된 우수 재판사례 중 하나다. 서울동부지법은 4월부터 ‘듣는 법정’ 프로그램을 시행 중이다. 지난해 10월 유모 부장판사(46)가 법정에서 진술이 오락가락한다는 이유로 60대 여성 증인에게 “늙으면 죽어야 해요”라고 폭언해 ‘막말판사’ 논란을 일으킨 데 대한 자성의 의미다.
반면 여전히 재판 진행이 고압적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판사들은 ‘판사석이 아닌 방청객석에서 바라보니 판사들 표정이 무서워 보이더라’ ‘당사자가 진술할 때 기록을 보는 모습은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느낌을 줬다’ ‘다소 정리되지 않는 발언을 한다고 말을 자르는 건 부적절해 보였다’ 등의 의견을 내놓았다.
김성규 기자 sunggy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