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때리던 글과 말… 비수로 돌아와 자신을 찌르다폴리페서 많더라도 정치와 언론 사이엔 돌아오지 않는 다리 있어야
황호택 논설주간 채널A 시사프로 ‘눈을 떠요’ 진행
윤 전 청와대 대변인은 코리아타임스 기자로 출발해 KBS를 거쳐 노태우 청와대의 정무비서실에서 행정관으로 1년 남짓 근무했다. 그의 첫 정치 외도(外道)였다. 언론계와 정계 사이에는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가 있다. 수시로 대학과 정계를 들락날락하는 폴리페서(polifessor·정치교수)들이 많지만 언론계는 폴리프레스의 복귀를 허용하지 않는다. 폴리프레스는 politics(정치)와 press(언론)의 합성어다. 윤 씨는 청와대를 떠나 세계일보에 들어갔다가 1997년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후보의 언론담당 보좌역으로 또 한 번 정치권으로 옮겨갔다. 이회창 후보가 대선에서 패하자 1998년 일본 게이오대로 연수를 떠났다가 캠퍼스에서 만난 한 정치인의 도움을 받아 1999년 문화일보 논설위원으로 또 한 번 언론계에 복귀했다.
문화일보를 떠나서는 인터넷 칼럼니스트로 활약하다가 방송에 출연해 박근혜 대선후보를 팍팍 밀며 반대 진영을 향해서는 가차 없이 포를 쐈다. 그의 ‘애국적 선택’은 적중했다. 그는 방송에 나와 대통령직인수위에 들어가라는 말은 “제 영혼에 대한 모독”이라며 “윤봉길 의사에게 ‘이제 독립했으니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하라’는 말과 같다”고 받아쳤다. 하지만 정치권에 두 번이나 들어갔던 그가 세 번째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키지도 못할 말을 하면서 본관이 같은 윤 의사까지 들먹인 것은 오버였다.
“청와대 대변인은 바로 대통령의 수준”을 보여주기 때문에 신언서판(身言書判)이 반듯한 사람이 대변인이 돼야 한다는 그의 글은 지금 박 대통령과 자신을 아프게 찌르는 비수가 됐다. 일제강점기와 독재정권 시대에는 말과 글 그리고 행(行)이 일치된 지사적 언론인들이 많았다. 이 시대의 저널리스트는 보도와 논평 기능을 수행하는 직업인이지만 언론을 정치로 가는 징검다리로 이용하고, 세가 불리하면 다시 언론으로 후퇴했다가 끊임없이 정치 실현을 위해 언론 행위를 하는 폴리프레스는 언론의 공정성과 국민의 신뢰를 갉아먹는다.
윤 씨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신랄하게 공격해 생각이 같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현장 정치경험은 그의 칼럼 쓰기에 생생한 소재를 공급했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어떻게 이런 일을 다 알고 있나 싶은 대목이 한둘이 아니어서 읽는 재미가 있었다. 그의 글에는 느낌표(!)가 유난히 많다. 언젠가 한 번 세어보니 칼럼 하나에 ‘!’가 20개 넘게 들어가 있었다. 통상 글에 느낌표가 많이 들어가면 절제미(美)를 떨어뜨리지만 그의 글에서는 묘하게 읽는 재미를 배가(倍加)시켰다. 기자들은 특정 단어나 구절을 강조하고 싶으면 작은따옴표 (‘ ’)로 싼다. 그러나 윤 씨의 느낌표는 작은따옴표의 시선 끌기를 넘어서 격정과 흥분을 전했다. 윤 씨는 정치인 때리기와 강한 우파적 논조의 칼럼을 통해 이름을 얻더니 지난 대선에서는 방송 스타로 떠서 마침내 청와대 대변인까지 진출했다.
뉴스와 오락, 진지한 것과 경박한 것, 공적인 인물과 유명 연예인을 가르는 벽이 허물어지는 시대다. 저널리스트와 엔터테이너의 경계도 희미해졌다. 방송은 스타를 키우고 스타를 잡아먹는다. 이제는 방송이 그를 공적 인물이 아니라 불륜을 저지른 유명 연예인처럼 다루고 있다. 어떤 기자도 그에게 애국적 선택의 미래에 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저 인턴을 불러들였을 때 팬티를 입었느냐 안 입었느냐, ‘딸 같은’ 아이의 엉덩이를 만져놓고 왜 허리를 툭 쳤다고 거짓말을 했을까를 따진다. 언론과 정치를 세 번 왕복(往復)한 폴리프레스의 허탈한 종착역이다.
황호택 논설주간 채널A 시사프로 ‘눈을 떠요’ 진행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