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32>비상사태 선포
1971년 12월 6일 발표된 박정희 대통령의 국가비상사태 선언을 보도한 조선일보 호외를 보고 있는 시민들. 조선일보 제공
조영래는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 사건으로 붙잡혀간 1971년 감옥 생활이 자신의 삶에 전환점이 되었다고 생전의 한 인터뷰(86년 4월 ‘샘이 깊은 물’)에서 말했다.
“서울구치소로 들어가 처음 얼마동안 독방에서 지내다 합방이 되어 ‘일반 잡범’들과 함께 지냈다. 방에는 나이 서른이 채 안 됐지만 ‘별’(전과)이 열 몇 개나 되는 사람도 있었고 3범 4범 5범들도 숱했다. 나는 한방에 오래 있게 되어 감방장(長)이 되었는데 관례에 따라 ‘신입’이 들어오면 감방장 자격으로 ‘신고식’을 치렀다. 나는 이를 자기소개로 대체했다.… 거의 예외 없이 ‘결손 가정’ 출신이었다. 나도 그 사람들 처지였다면 꼭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언행이 일치한 사람이었다.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이기도 했지만 마음이 따뜻해 주변의 어려운 친구가 있으면 자기 일처럼 나서 도와줬다. 신입생 시절, 내가 지방 출신이라 서울에 인맥이 없다 보니 과외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면식도 없는 내게 일자리를 구해주어 그와 인연을 맺게 됐다. 그 뒤부터 나는 조영래 말이면 무조건 따랐다(웃음). 6·3데모 때에도 나더러 깃발을 들라고 해 선뜻 나섰다. 사회에 나와서도 계속 만났다. 그는 한번 일을 맡으면 사건이 일어난 전후배경까지 일목요연하게 훑었다. 정말 뛰어난 사람이었다.”
조영래는 ‘서울대생…’ 사건으로 1년 6개월을 복역하고 난 후 1974년 긴급조치 4호와 민청학련 사건으로 다시 수배되는데 수배 중에도 치밀한 취재를 통해 ‘전태일 평전’을 써낸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3선 개헌과 전태일 때문에 박정희를 미워하게 됐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가 민주화투쟁의 전 과정에 끼친 영향은 실로 심대하다. 최근 들어 종북 좌파 인사들 때문에 빛이 바랬지만 민주화운동 인사들 중에는 조영래처럼 보석 같은 영웅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아쉽지만, 고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향후 소개될 민청학련 사건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기 때문이다.
휴일을 쉬고 한결 추워진 날씨 때문에 몸을 움츠리며 출근했던 시민들은 일손과 발걸음을 멈추고 오전 10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윤주영 대변인의 긴장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 시간 전인 오전 9시 국가안전보장회의와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이날 발표된 내용은 간단하지만 지금 잣대로 보면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전문을 그대로 옮겨 본다.
“최근 중공(中共)의 유엔 가입을 비롯한 국제정세의 급변과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 및 북한 괴뢰의 남침 준비에 광분하고 있는 제 양상들을 정부는 예의 주시 검토한 결과 현재 대한민국은 안전보장상 중대한 차원의 시점에 처해 있다고 단정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여 온 국민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다음과 같이 정부와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이 비상사태를 극복할 결의를 새로이 할 필요를 절감하며 이에 선언한다.
일(1). 정부의 시책은 국가안보를 최우선으로 하고 조속히 만전의 안보태세를 확립한다.
삼(3). 언론은 무책임한 안보논의를 삼가야 한다.
사(4). 모든 국민은 안보상 책무수행에 자진 성실하 여야 한다.
오(5). 모든 국민은 안보 위주의 새 가치관을 확립 하여야 한다.
육(6). 최악의 경우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자유의 일부도 유보할 결의를 가져야 한다.
1971년 12월 6일 대통령 박정희
이날 발표는 1년 뒤 출범하는 유신체제를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당시 사회분위기는 그토록 위험수위였던가. 비록 사법파동이나 광주대단지 사건, 학생들의 교련반대시위가 잇따르고 있긴 했지만 비상사태를 선포할 정도로 엄청난 무질서와 정치적 위기가 초래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오늘날 지식인 사회의 중론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흔쾌하진 않았지만 비상사태 시국을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선포가 나온 당일인 1971년 12월 6일자 경향신문 보도다.
‘“현 시점에서는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느냐”고 한마디씩. …서울대학교 한 교수는 “국제정세 등으로 보아 정신무장이 필요한 시기이기는 하나 앞으로 조처 등에 대해서는 좀더 폭넓은 여론을 바탕으로 해야 할 것”이라고 했고 학생들은 “비상시국에 대처할 마음의 각오는 서야겠지만 좀더 구체적이고 납득할 만한 바탕이 뒷받침되어야 하겠다”고 했다.’
도심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같은 신문 7일자 보도이다.
‘이제까지 막연하게만 느꼈던 국가안보 문제를 절감한 듯 대부분의 시민들은 일찍 집으로 돌아가 평상시보다 밤거리가 눈에 띄게 한산했다. 명동 무교동 등 유흥가에는 밤늦게까지 흥청대던 전날까지와는 달리 발길조차 뜸해 밤 11시쯤 대부분 술집이 문을 닫았다. 귀가길 화제는 단연 비상사태 선언. 시내버스정류장에서 귀가를 서두르던 정성교 씨(31·회사원)는 “새삼 느껴진 안보문제 때문에 곧장 집에 들어간다”고 했다.’
12월 7일자 동아일보도 ‘국가안보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앞으로의 국민생활이 크게 규제받을 것이라 함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북괴의 무력증강과 침략성이 아직 가시지 않고 있음이 현실이라고 볼 때 국민의 대공(對共) 경각심은 더욱 고양되어야 하고 이러한 점에서 대통령의 선언이 발(發)하게 된 동기도 짐작할 수 있겠다’고 했다.
비록 언론에 대한 검열과 감시가 높은 상황에서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고는 해도 당시 보도들은 시중 여론을 일부분 반영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실제로 당시 대다수 국민들 사이에는 안보 불안감이 만연해 있었다. 3선 개헌이 있었던 1969년 말 국토통일원 전국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북한의 무력도발 행위에 대해 응답자의 82%가 “매우 분개한다”고 했다. 이런 기조는 70년대 들어서도 바뀌지 않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북한의 도발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