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치인이 침략을 부정하고 북한이 6·25 침략을 부정하듯 좌우익 전체주의의 습성은 역사를 정치적 수단으로 악용 이들의 또다른 침략을 막으려면 역사지성(歷史知性) 키워야
김명섭 객원논설위원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두 정상이 평화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 재개에 합의하면서 4개 도서의 등면적(等面積) 분할이 유력한 해법으로 떠올랐다. 이 해법에 따르면 일본은 과거 러시아가 약속했던 2개 도서 반환보다 많은 3개 이상의 도서를 반환받고, 가장 큰 섬인 이투루프 섬을 공동개발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그 결과 러일평화조약이 체결되면, 동북아지정학은 급변하게 된다. 내친 김에 두 사람은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까지 노릴지 모른다. 노벨평화상은 인간적 평판과는 무관하게 평화조약 체결에 국한해서 수여한 전례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웃국가에 대한 침략을 사죄하기는커녕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정치인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임진왜란 이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조차도 개전대비(改前代非·전대의 잘못을 바로잡겠다)라는 문구를 써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 책임을 인정했었다. 최근 일본 정치인들이 침략 사실을 부정하는 저변에는 1910년 한일병합이 근대국제법적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는 잘못된 역사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1904년 한국 침략 이후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1907년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그리고 1910년 순종이 한일병합에 동의했다고 국제사회에 선전했다. 이후 일본제국 내의 ‘조선’으로 격하된 한국이 국제법적으로 다시 분리된 것은 1952년 발효된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의해서였다고 일본은 주장한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의 최종본에 명기되지 않은 독도는 일본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는 논리로 국제사법재판소를 설득하려 하고 있다.
동북아평화공동체를 향한 꿈은 소중하다. 그러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침략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국가와는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침략 사실을 부정하거나 호도하는 국가와 덮어놓고 화해하자는 것은 과거의 침략에 대한 은폐를 돕고, 미래의 침략을 부추긴다. 한때는 무오(無誤)한 존재로 신봉되던 로마교황도 1999년 발표한 ‘기억과 화해’ 문서를 통해 십자군(十字軍)전쟁의 오류를 인정한 바 있다. 이제 더이상 ‘일본천황’을 로마교황과 동급으로 봉대(奉戴)하면서 교황과 같은 ‘무오류’성을 주장하는 극우논리는 설 자리가 없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이 당했던 또 다른 침략도 마찬가지다. 북한정권은 아직도 6·25전쟁이 미국과 한국의 침략에 의해 일어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1950년 전쟁 발발 직후부터 이런 북한정권의 주장에 현혹됐던 국내외 지식인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냉전이 끝나고 북한정권의 주장이 허구로 드러나자 1950년 6월 25일에 누가 침략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새로운 주장이 대두됐다. 침략의 과거는 덮어놓고, 서로 화해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3년 파리평화협정을 보자.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미군이 철수하자 2년 만에 사라진 ‘월남’은 물론, 승리한 베트남공산당도 평화협정이 평화를 가져다주었다고 기록하지는 않았다. 베트남에 ‘평화’를 가져다 준 것은 1973년 평화협정이 아니라 1975년 공산화통일이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산화=평화라는 베트남 공산당의 생각이 흔들리게 된 것은 1979년 중국공산당의 침략 결정으로 시작된 제3차 인도차이나전쟁 때문이었다.
김명섭 객원논설위원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bluesail@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