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그 자체 목적이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은 없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상처가 만만치 않지요? 누추하거나 덤덤한 인생에 별처럼 다가와 불꽃처럼 사라진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서 당신은 어떻게 하셨나요? 개츠비는 열심히 돈을 벌었습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연인이 떠났다고 믿었으니까요. 그리고 부자가 되어 이미 유부녀가 된 연인 앞에 나타납니다. 모든 걸 되돌리겠다는 거지요.
그거 아세요? 사랑이었고 그래서 희망이었던 여인, 희망이었기에 미래이기도 해서 그녀 없이는 어떤 영광도 공허해지는 남자의 강한 집착! 가난을 벗어났어도 여전히 가난했던 시절을 벗어버리지 못한 남자의 콤플렉스라 하기엔 개츠비는 너무나 거침없고, 사랑이 성공의 완성이었던 시대에 남자의 야망이라고 폄훼하기엔 개츠비는 너무나 순수합니다.
그런데 그런 속물을 잊지 못해 속물이 원하는 모든 것을 속물스럽게 얻은 개츠비가 왜 위대한 거지요? 개츠비를 추동하는 에너지가 낭만, 낭만이기 때문입니다. 연인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는 자는 비난할 수 없지 않나요? 더구나 별 가치도 없는 연인을 위해 개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자,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질 수 있는 자 앞에서 무슨 훈수를 둘 수 있을까요?
위대한 개츠비를 보면서 많이 졸긴 했지만 문득문득 눈이 반짝했던 건 개츠비의 성격이 내가 좋아했던 누군가를 닮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개츠비가 까치를 닮지 않았나요? ‘공포의 외인구단’의 까치! 별것도 아닌 속물 엄지가 뭐라고, 엄지를 위해서는 어느 것도 아깝지 않은 듯 그 무엇도 아끼지 않았던 우리의 까치 말입니다.
목숨 건 사랑의 아이콘 ‘까치’를 낳은 이현세 선생은 까치가 자신의 콤플렉스가 만든 인물이라 고백하면서 허기진 것 같기도 하고 미친 것 같기도 했던 그의 젊은 날의 초상을 완성하고 거기서 걸어 나왔다고 했습니다. 충분히 사랑하고 사랑받은 까치는 그럴 수 있었겠으나 각박한 속물들의 등쌀에 밀려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개츠비는 죽었다고 해서 사랑의 집착이 끝날 것 같지 않네요.
고독이나 절망뿐인 사랑이라도 포기할 줄 모르고 사랑에만 몰입했던 순수한 영혼에게는 저절로 ‘위대한’이란 수식어를 붙여주고 싶지 않나요? 위험하지 않은 모험이 없듯 어리석은 줄 모르는 사랑은 없습니다. 집착은 사랑이 아니라고 옆에서 아무리 말려도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그 어리석은 사랑을 멈추지 않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아니 위대합니다. 탈 대로 다 타지 않고서는 집착은 끝나지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