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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워 또만나/반또 현장]“덜 자란 어른들의 놀이?… 어엿한 文壇이랍니다”

입력 | 2013-05-25 03:00:00

SF-판타지 장르 팬들의 세계
‘아지트’ SF&판타지 도서관… ‘등용문’ 환상문학 웹진 거울




11일 벼룩시장이 열린 SF&판타지도서관에서 전홍식 관장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왼쪽 사진). 다음 날인 12일 거울 운영진인 최지혜 씨(모자 쓴 사람)와 박애진 씨가 동아미디어센터의 스튜디오에서 재미있는 자세를 연출했다. 김재명·최혁중 기자 base@donga.com

“솔라리스다!”

“뭐, 솔라리스? 어디, 어디?”

독주를 몇 잔씩 걸친 것처럼 이상하게 들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작은 파문이 퍼진다. 책이 잔뜩 꽂힌 매대 앞에 선 한 청년은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처럼 득의만면했고, 옆에 선 다른 청년은 ‘놓쳤다’는 표정이었다. ‘솔라리스’는 폴란드 작가 스타니스와프 렘이 1961년에 쓴 공상과학(SF)소설이다. 고전 명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내용이 썩 쉬운 편은 아니어서, 몇 번 국내에 번역서가 나왔지만 꾸준히 팔리지 못하고 이제는 찾기 어려운 책이 됐다.

“이제 5분 뒤에 강연 시작합니다! 상영관에서 환상문학에 대한 무료강연 있어요!”

카운터에서 밀려드는 구매 주문을 처리하던 전홍식 씨(39)가 일어나 외치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게임 시나리오 작가인 그는 이곳, 국내 유일의 ‘SF&판타지도서관’ 관장이다. 이날, 11일은 이 도서관에서 할인도서와 중고도서를 판매하는 벼룩시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오해 받을수록 끈끈해지는 결속

어느 문화권에서나 SF와 판타지 장르의 팬들은 가벼운 조롱거리 취급을 당한다. 일반인 대부분이 이 장르의 열성 팬들을 ‘허황된 일에 매달리는 괴짜’ 내지는 ‘덜 자란 어른’이라는 시각으로 본다. 팬들이 자기 장르의 깊이와 작품성에 대해 설명할수록 외부인의 눈에는 더 기괴한 사람으로 보이는 부작용이 일어날 뿐이다. 게다가 이 장르의 팬들은 대체로 비교적 교육수준이 높고, 장르에 대한 자부심과 자의식이 강하다. 놀려먹기에는 안성맞춤인 대상이다.

밖에서 무시당하면 안으로 뭉치게 된다. 미국과 유럽 주요 도시에서 SF컨벤션이 열리면 각종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한 팬들이 모여서 밤새도록 남들 앞에서는 못한 외계인에, 나노테크놀로지에, 초능력에, 용과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실컷 한다. 그런 팬덤문화 자체가 영화 ‘갤럭시 퀘스트’나 미국 드라마 ‘빅뱅이론’에서처럼 영화·드라마의 (웃음거리) 소재가 될 정도로 낯설지 않다.

그런 미국과 유럽의 팬들에 비하면 국내 SF·환상소설 팬덤은 수줍은 편이다. 취향을 설득할 수 없다면 한국에서 나온 작품으로 ‘반지의 제왕’이나 ‘아이언맨’ 시리즈처럼 상업적인 위력이라도 꾸준히 보여줘야 그나마 덜 무시당할 텐데, 국내에는 그런 사례가 별로 없다. 반면 장르에 무지한 영화 제작자들이나 출판사가 할리우드 영화만 보고 팬덤의 작가나 팬들과 이런저런 기획을 벌이다 ‘말아먹은’ 사례는 많다.

‘대부분의 사람은 우리를 천대하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조차 우리를 오해한다’는 인식이 팬들 사이에 퍼져 있으니 안으로 뭉칠 동력은 충분한 셈이다. 그냥 우리끼리 마음 편하게 놀고 책도 우리끼리 내자, 해서 만들어진 곳이 SF&판타지도서관과 웹진 ‘거울’이다. 도서관은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거울은 인터넷 공간에 있다.



도서관 구심점 삼아 모임 활발

2008년 4월, 대전 꿈돌이랜드에서 ‘대한민국 SF컨벤션’ 행사가 열렸다. 엑스포공원과 꿈돌이랜드에서 열린 ‘사이언스 페스티벌’의 부대 프로그램 성격이었다. 기차를 타고 내려가 여관을 잡고 컨벤션을 도왔던 팬들은 행사의 내용이나 방향이 자신들과 동떨어져 있다고 여겼다. 뒤풀이 자리에서 열성 팬들이 ‘우리만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전홍식 씨가 다음 해인 2009년 사비를 들여 서울 동작구 사당동에 SF&판타지도서관을 열기에 이르렀다.

150m² 정도 넓이인 도서관 입구 복도에는 A4 용지 3쪽에 걸쳐 빼곡히 적힌 자료 기증자 명단이 붙어 있었고, 그 옆에는 서로의 글을 비평해준다는 장르문학 스터디클럽 ‘리시브’의 회원모집 공고가 있었다. 방문자의 서명을 액자에 담아 전시한 코너에는 미국의 유명 소설가 테드 창의 응원 글도 있고, 배명훈처럼 문단의 주목을 받는 장르 작가들의 사인도 보인다. 장서는 1만4000여 권, 소장하고 있는 DVD는 1000여 점이다. 운영위원 6명에 파트타임으로 사서를 따로 고용하고 있다. 18일이면 지금 위치로 자리를 옮겨 서대문구에 정식으로 도서관 등록을 한 지 꼭 1년이 된다.

“단순히 책을 보는 공간이 아닙니다. 이 장르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문화공간입니다.”

전 관장의 설명에 다른 팬들도 열렬히 맞장구를 친다. SF·환상문학 창작모임 ‘몽니’를 운영하는 송한별 씨(24·대학생)는 “장르 팬들의 구심점 역할을 해주는 공간”이라고, 온우주출판사의 이규승 대표(42)는 “팬들이 오프라인에서 서로 얼굴을 볼 수 있는 고마운 장소”라고 말했다. ‘어벤져스’나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밤샘 상영회, 작가들과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독자와의 만남’ 행사, 장르소설 작법이나 독법에 대한 강좌가 꾸준히 열린다.

그럼에도 재정난에 허덕이고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도서관 지원 사업에서 소외되는 모습은 한국 장르문학계가 처한 현실과 똑같다. 전 관장은 “한 달에 드는 돈이 임차료를 포함해 200만 원 정도인데 도서관 자체 수입에 월급을 탈탈 털어 마련한다”며 “마니아만 올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니 많은 분이 오셔서 함께 즐겼으면 한다”고 말했다.



장르문학 팬들이 만든 ‘창작과비평’

‘지우전’(2011년·페이퍼하우스)과 ‘부엉이 소녀 욜란드’(2013년·폴라북스)를 쓴 환상문학 소설가 박애진 씨(36·여)는 1999년 PC통신 하이텔에 단편소설을 올리면서 작가생활을 시작했다. 2001년 제1회 이매진 단편공모전에서 가작을 수상했고, 이후에도 꾸준히 판타지 작가로서 활동하고 싶었는데…, 장르문학 단편을 실어주겠다는 문예지나 동인모임이 없었다. 그래서 직접 만든 게 ‘거울’이다.

‘환상문학웹진’이라는 수식어가 달려 있긴 하지만 웹진 형태를 한 창작집단, 동인모임이라는 설명이 더 정확하다. SF와 판타지 팬덤에서 ‘거울’은 계간지 ‘창작과비평’을 내는 출판사 ㈜창비와 같은 역할을 한다. 기성 작가들의 단편소설을 매달 6∼8편씩 발표하고, 각종 기획기사와 비평을 쓰며, 신인 작가를 발굴하고, 기획단편선이나 작가별 단편선을 포함해 지금까지 소설책 14권, 비평서 1권을 발행했다. 전자책을 포함하면 웬만한 출판사보다 출간 서적 수가 더 많다. 매달 뽑는 독자단편 공모에는 20∼40명이 몰린다.

다음 달로 꼭 창간 10년이 되는 거울은 119개월 동안 118호를 냈다. 처음에는 6, 7명으로 시작했는데 이제는 소설가 40여 명, 번역자 10명, 기사와 삽화 필진 27명이 글을 쓴다.

“다들 무료로 글을 주시는 거죠. 일종의 재능기부랄까요. 밖에서 보기에는 이해가 안 갈 텐데, 작가들이 ‘거울’을 믿어요. 출판사에서는 이 장르를 가볍게 보고 쉽게 시작했다 접는 기획이 많은데 우리는 어떤 중단편선을 내겠다고 하면 내거든요.”

박 씨는 “고급인력을 부려먹고 있다”고 웃으며 “이들이 거울에 대해 ‘장르 팬들의 마지막 보루’라는 인식을 갖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필진 중에는 현직 출판사 편집자나 번역자, SF·판타지 공모전을 통해 정식으로 등단한 소설가가 상당수 있고 변호사 같은 전문직 종사자도 있다. 이 중 일부는 SF&판타지도서관의 운영진이기도 하다.

배고프고 가난한 것은 SF&판타지도서관과 비슷하지만 그래도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서 사정이 좀 낫다. 종이책을 낼 때에는 가장 최근에 출판한 책의 수익금을 그대로 다음 책 제작에 쓴다.

“한국에서 SF·판타지를 좋아하면 이유 없이 소수자 취급을 받아요. 차라리 ‘도박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더 쉬울 것 같아요.”

거울 3기 편집장인 최지혜 씨(35·여)는 이렇게 말했다. ‘타인의 취향’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관대하거나 말거나 최 씨와 거울은 요즘 이미 절판된 책을 전자책으로 복간하거나 팟캐스트 방송에 진출하는 방안을 구상 중이고, 궁극적으로는 오프라인 문예지를 만들 꿈을 꾸고 있다.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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