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공간 마련… 첨단도서관…한국기업의 메세나활동 핵심역량서비스로 진화
기업이 문화 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일을 뜻하는 ‘메세나’는 이제 단순히 금전적인 지원만을 뜻하지 않는다. 유명 문화 예술인들을 초빙해 예술가를 꿈꾸는 어린이들과 연결해주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음악 영재 육성을 위해 만든 LG그룹의 ‘사랑의 음악 학교’.
그래서 RSC는 현대 기업들이 사용하는 성장 전략을 도입하기로 결정한다. 이른바 빅 데이터를 활용한 고객관계관리(CRM) 기법이었다. 이들은 어떤 고객들이 극장을 찾아오고, 개인별 특징에 따라 선호하는 연극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등을 분석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RSC는 2000년 이후 판매한 모든 티켓 정보와 고객 정보를 분석 가능한 데이터로 컴퓨터에 재입력했다. 이 데이터는 고객의 이름과 주소, 지불한 입장권 가격과 방문 날짜 등을 담고 있었다. 》
전통 극단을 바꾼 현대 기술
이 분석을 통해 RSC는 일반적인 현대 기업들이 하는 것과 비슷한 마케팅 전략을 세울 수 있게 됐다. 어떤 시기에 어떤 공연을 하는 게 좋을지, 새롭게 공략해야 할 고객군은 누구인지를 정량적 데이터를 통해 파악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RSC는 이 분석을 통해 왕립 셰익스피어 극장이 자리 잡은 스트랫퍼드 지역의 방문자들이 극장 재방문율이 높은 충성 고객임을 확인했다. 이 지역의 고객들은 적어도 1년에 4회 이상 극장을 찾았으며 극단 수입의 59%가 이들로부터 나왔다. 가장 충성도가 높은 스트랫퍼드 고객들의 높은 충성도를 계속 유지하는 게 극단이 생존하는 핵심이었다.
반면 런던에서 찾아오는 고객들은 방문자 수로는 전체 고객의 17%밖에 안 됐지만 비싼 좌석을 사는 경향이 있어서 매출액 기준으로는 전체의 45%를 기여했다. 이른바 ‘런던 고객군’인데 이들에게는 표를 사는 데 있어 뚜렷한 특징이 있었다. 연극의 캐스팅에 따라 표를 사고 말고가 크게 좌우됐던 셈이다.
RSC는 이를 바탕으로 충성 고객을 유지하는 한편, 런던 고객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캐스팅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과제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특히 이들은 주로 온 가족이 함께 즐길 만한 연극을 구매했다. 즉 이들의 방문을 더 늘릴 수 있다면 RSC의 성장 가능성이 높아지는 셈이었다. 그래서 인터넷 예매 사이트를 통해 가족 연극 광고를 늘린다거나 할인 행사를 제공하는 방식이 도입됐다.
저소득층이나 취약계층 청소년들의 공연 후원 프로그램인 신세계그룹의 ‘사랑 나눔 콘서트’.
이런 분석을 예술 전문가들인 RSC의 스태프들이 스스로 모두 해내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비용도 많이 드는 일이었다. 이 작업을 한 건 글로벌 컨설팅 업체 액센추어다.
액센추어는 RSC의 고객 데이터를 이탈리아 밀라노의 액센추어 데이터센터로 보내 분석 가능한 데이터로 바꿨다. 이렇게 변환된 데이터는 인도 방갈로르의 액센추어 분석 시스템을 이용해 분석됐다. 런던 고객군이나 인터넷 고객군 등 고객 세분화 작업이 이뤄진 게 이 과정을 통해서다. 물론 이는 모두 무료였다. 액센추어가 문화예술 활동을 후원하는 메세나 활동의 일환으로 이런 작업을 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메세나 활동은 기업이 문화예술인의 활동을 과거 귀족이나 왕족이 후원한 것처럼 금전적으로 후원하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최근에는 액센추어의 사례처럼 기업들의 메세나 활동이 단순히 돈만 지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재능 기부 형태로 진행되는 식으로 발전하고 있다. 후원이 필요한 문화예술 단체나 예술가에게 기업의 핵심 역량에 해당하는 서비스를 직접 지원하는 셈이다.
한국의 메세나 활동
경기 이천시와 충북 청주시의 어린이들에게 악기 교육 프로그램 SK하이닉스의 ‘꿈의 오케스트라’ .
LG그룹의 LG연암문화재단은 LG그룹 계열사의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LG상남도서관을 세웠다. LG상남도서관은 일명 ‘책 읽어주는 도서관’으로 유명한데 시각장애인들도 문화예술 콘텐츠에 접근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책을 디지털 음성콘텐츠로 변환해 소리내 읽어주는 첨단 도서관을 지은 것이다.
현대자동차도 이 회사의 ‘그랜저’를 활용한 ‘드림 소사이어티’ 전시회를 진행하고 있다. 그랜저 차량의 각 부분을 개조하거나 전시물의 일부로 활용하는 공간 전시회를 통해 작가와 대중과의 만남을 돕는 행사다. 또 타이포그래피(서체디자인) 분야의 세계적 디자이너 스테판 사그마이스터에게 기아차의 ‘쏘울’ 차량 디자인을 맡기는 등 예술가들의 활동을 제품 생산 과정과 결합하기도 한다.
김상훈 기자 sanh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