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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락 “김지하를 잡으면 반병신을 만들겠다”

입력 | 2013-05-27 03:00:00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34>비어(蜚語)




1968년 7월 1일 우리나라 첫 추기경으로 임명된 김수환 추기경이 청와대를 방문해 박근혜 당시 큰 영애(令愛)와 악수하고 있다. 육영수 여사도 환한 얼굴로 추기경을 맞고 있다. 이 모습을 박정희 대통령이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동아일보DB

공화당은 71년 12월 27일 새벽 3시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여당 단독으로 통과시킨다. 국가의 안전과 관련된 내정·외교 및 국방상 조치를 사전에 취할 수 있도록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하기 위해 제정된 이 법률은 앞서 박정희 대통령이 12월 6일 내린 국가비상사태 선포를 구체적인 실정법으로 뒷받침한 것이었다.

본문 12개 조항과 부칙으로 구성된 이 법의 골자는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고 △물가 임금 등에 일시적 통제를 할 수 있도록 경제 규제를 명령할 수 있으며 △국방상의 목적을 위해 땅이나 사람에 대해 동원령을 선포할 수 있으며 △주민의 소개(疏開)를 명할 수 있고 옥외집회나 시위를 규제할 수 있으며 △언론 출판에 대한 특별조치를 취할 수 있고 △국가기관, 지방자치단체 및 공익사업체 등 특정한 근로자의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제한할 수 있으며 △군사상 목적을 위해 세출예산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헌법에 규정된 절차를 깡그리 무시하고 민주주의의 핵심요소인 노동자의 기본적인 생존권보장조차도 무시하는 탈(脫)헌법, 탈민주주의를 내건 무시무시한 법이었다. 세상은 전시(戰時) 체제에 들어간 듯했다. 모두들 숨을 죽였다.

그런데 법이 통과되기 이틀 전 일이 터졌다. 김수환 추기경이 TV로 생중계된 명동성당 성탄 자정미사에서 정부와 여당을 향해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숨죽인 청중들 앞에 추기경의 작심한 듯한 발언이 이어졌다.

“여러분은 이른바 ‘국가보위특별조치법’이 필요불가결의 것이라고 양심적으로 확신하고 계십니까? 이 시기에 과연 국민총화를 이룩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믿고 있습니까? 민주국민의 정신을 위축시키고 정부와 국민의 위화감을 조장할 뿐 아니라, 국민총화 자체를 오히려 해칠 염려가 크다고 생각해볼 수는 없습니까? 이 법은 북괴의 남침을 막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국민의 양심적인 외침을 막기 위해서입니까?”

평소 인자한 미소가 트레이드마크였던 그의 얼굴에 비장함이 서렸다. 그의 말은 이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한테 막강한 권력이 가 있는데 이런 법을 또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害)를 줄 것입니다.”

추기경의 예상치 못한 ‘정치적’ 발언에 미사에 참석한 2000여 신도들과 TV로 이를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전율했다. 3년 전 대한민국 첫 추기경이 되어 한국 가톨릭의 자랑으로 존경을 받던 분이었기에 말의 무게는 더 컸다. 당사자인 추기경의 고뇌도 컸다. 그는 훗날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당시엔 정부에 비판하는 말을 할 경우 누가 기자회견을 해도 신문이 전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니 생방송은 정말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내가 꼭 해야 하느냐’ 하는 생각에 크리스마스이브날 밤을 꼬박 새웠다. 성탄 자정미사 한 시간 전에야 ‘나 아니면 말할 사람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본래 미사 강론에 없던 문장을 삽입했다.”

추기경은 이듬해 유신이 선포되었던 72년 10월 17일에는 이탈리아 로마에 머물다 소식을 듣고 로마 주재 한국대사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10월 유신 같은 초헌법적 철권통치는 우리나라를 큰 불행에 빠뜨릴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2009년 2월 16일 선종할 때까지 70년대에는 유신체제를 향해, 80년대에는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90년대에는 북한의 인권개선과 체제변화를 위해 시대마다 국민들의 억눌린 마음을 대변해왔던 고인의 삶을 다시 한 번 새기게 되는 대목이다.

추기경이 자정미사를 마친 몇 시간 뒤인 성탄절 아침(오전 9시 50분), 서울엔 큰불이 나 성탄 분위기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사망자 163명, 부상자 64명으로 세계 호텔 화재사건에 ‘이름’을 남긴 서울 충무로 22층 대연각호텔 화재였다.

불길을 피해 뛰어내리는 사람들 모습이 TV 생중계에 잡혀 충격을 주기도 했다. 추락 사망자만 30명이었다. 불은 쉽게 진화가 안돼 박 대통령이 직접 현장을 돌아볼 정도였다.

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71년이 가고 있었다.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10년인 ‘1970년대’는 한 해 한 해가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였다. 압축성장의 빛과 그늘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시기였기 때문이다.

1966년부터 시작된 고도성장은 박 대통령 재임기간인 1979년까지 계속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전태일 분신이 있었던 70년 말을 시작으로 71년은 산업화의 그늘이 박 정권에 본격적으로 전방위적 균열을 가한 해라고 할 수 있다.

집권층 내 심장부(사법파동)에서부터 기층민중들(광주대단지사건)과 지방 소도시(원주시위)에까지 반정부 분위기가 확산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박 정권이 비상사태 선포로 상징되는 물리력을 동원한 ‘공포 정치’를 시작한 해가 또 71년이다.

1972년 새해를 맞은 대한민국은 곧이어 터져 나올 7·4남북공동성명과 ‘유신’으로 또다시 격변의 한가운데로 들어선다.

비상사태 선포로 ‘긴장된 침묵’이 지배하고 있었던 72년 봄 김지하는 또다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는다. 가톨릭 종합교양지 ‘창조(創造)’에서 4월호에 오적류의 담시(이야기 시)를 써달라는 주문이었다. 김지하는 원고를 쓰기로 하고 제목을 ‘비어(蜚語)’로 하기로 했다. 유언비어(流言蜚語)의 준말이었다. 김지하의 말이다.

“‘메뚜기처럼 뛰는 말’, 즉 ‘소문’이란 뜻이었다. 정보부에 대고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소문에 의하면 이렇고 저렇고 그렇다더라’ 하는 의미로 쓴 것이다.”

‘서울 장안에 얼마 전부터 이상야릇한 소리가 자꾸, 자꾸만 들려와/그 소리만 들으면 사시같이 떨어대며/식은땀을 줄줄 흘려 쌌는 사람들이 있으니 해괴헌 일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비어’는 판소리 형식이지만 ‘오적’처럼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 편의 각각 다른 이야기다. 부패한 특권층의 타락과 위선을 풍자하고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돈을 벌려고 애쓰다 죽는 서민과 그 죽음에 대한 저항을 그렸다는 점에서 ‘오적’과 일맥상통하는 저항시였다.

‘비어’가 발표되자 중앙정보부가 발칵 뒤집혔다. 김지하는 당시 친하게 지내던 중앙정보부의 이종찬(전 국정원장)으로부터 “빨리 도망가라”는 연락을 받는다. 김지하의 말이다.

“이 선배 말이 ‘이후락 정보부장이 엄청 화를 냈다. 이번에 김지하를 잡으면 반병신을 만들겠다’는 거였다.”

잠깐, 여기서 독자들은 고개가 갸우뚱할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파수꾼 노릇을 자처했던 중앙정보부 중견 간부가 자나 깨나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골몰하고 있던 운동권 청년에게 도피를 주문했다고? 언뜻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지만, 두 사람 사이엔 시대가 만든 ‘아름다운 인연’이 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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