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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주성하]평양에서 배운 ‘임을 위한 행진곡’

입력 | 2013-05-27 03:00:00


주성하 국제부 기자

‘임을 위한 행진곡’을 김일성대에서 배웠다. 대학을 방문하는 전대협 학생들을 연도에서 환영할 때 부르라고 했다. 학내 스피커를 통해 누군가가 선창하는 노래를 한 번, 두 번 합창으로 따라 부를 때 우리는 어느새 이 노래가 지닌 비장함에 물들어 있었다. 김일성대에서 한국 노래를 가르쳐 준 것은 그때가 아마 유일할 것이다.

‘아침이슬’은 평양고사포병부대에서 배웠다. 북한 대학생들은 6개월 동안 의무적으로 대공포부대에서 근무해야 한다. 어느 밤 중앙당 간부의 아들인 명철이가 대공포 상판 위에 올라가 기타를 치며 이 노래를 목청껏 불렀다. 노래는 긴 밤 당직 근무에 시달리던 우리들을 단숨에 전염시켰다. 어느 나라 노래인지 누구도 묻지 않았다. 어떤 날엔 중대 대열 합창으로 아침이슬을 부르기도 했다. 김정일 호위병 출신도, 장관의 아들도, 보위부 고위 간부 아들도 모두 함께 불렀다. 그리고 2∼3년 뒤 이 노래는 북한 전역에 확산됐다. 북한은 1998년 이 노래를 금지곡으로 정했다. 하지만 지금도 술자리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북한 주민이 적지 않다.

탈북하기 전까지 나는 밤하늘의 어둠을 벗 삼아 임을 위한 행진곡과 아침이슬을 조용히 부르곤 했다. 함성도 맹세도 산자도 존재할 수 없는 그 땅의 긴 밤을 홀로 서러워하며…. 그러다 끝내 그 서러움을 모두 버리고 탈북이라는 목숨 건 거친 광야에 나섰다.

한국에 와서 북한에 전해주고 싶은 노래가 또 생겼다. 수습기자 시절 열흘 넘게 시위 현장을 따라다니며 배운 ‘불나비’란 노래다.

내가 일하는 동아일보사 앞은 시위의 단골 장소다. 때론 퇴근하다 시위대가 합창하는 노랫소리에 끌려 한참을 서서 입속으로 함께 부를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북한에서 벗이 돼 주었던 그 밤하늘을 쳐다보며 눈물을 글썽인다. 가슴에 한이 맺혀서다. 아직은 너무나 젊은데, 피가 뜨거운데 정작 아무것도 못하고 그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억울해서다.

여기가 평양이고, 청와대가 노동당 중앙당 청사이고, 시위대가 평양시민들이라면….

지금 당장 북에 갈 수 있다면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과 같은 허울뿐인 멍에에 갇혀 노예로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임을 위한 행진곡과 불나비를 가르쳐주고 싶다. 동독에서 외쳤던 ‘우리가 인민이다’라는 구호와 함께. 오늘날 이 노래가 가장 필요한 곳은 다름 아닌 북한이다.

진압군과 대치한 평양 시위대의 맨 앞줄에서 다른 이들과 어깨를 겯고 “산자여 따르라”를 목청껏 부르는 상상을 하면. 오! 내 마음은 터질 것 같다. 북한의 4중, 5중의 감시망이 존재하는 한 그 어떤 시위도 조직될 수 없다는 것은 잘 안다. 설령 어찌어찌하여 사람들이 시위대로 변해 거리에 나온다 해도 순식간에 시체더미로 변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꿈을 꾸는 존재다.

“다행히도 난 아직 젊은이라네.” 내 생전에 꿈이 이뤄지기를.

주성하 국제부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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