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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 64명과 동고동락… 제과제빵도 도전”

입력 | 2013-05-28 03:00:00

지적장애인들과 인쇄업체 ‘베어베터’ 세운 김정호 前 NHN 한게임 사장




NHN 창업멤버에서 정신지체 장애인 기업인 ‘베어베터’의 대표로 변신한 김정호 전 NHN 한게임 사장(모자 쓴 사람)이 베어베터의 제품인 인쇄물, 과자 등을 들고 직원들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김정호 증인, 온라인 게임이 ‘바다이야기’처럼 교묘하게 도박화됐잖아요. 이것이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몰고 올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2009년 10월 16일, 김정호 당시 한국게임산업협회장(NHN 한게임 사장)은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장 증인석에 앉아 있었다. 의원들은 바다이야기와 온라인 고스톱의 차이를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온라인 게임을 ‘악의 근원’으로 몰아붙였다. 돈벌이에 급급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게임업계도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국감이 끝난 뒤 NHN 창업멤버였던 김 사장은 돌연 업계를 떠났다. “국회의원들과 게임업계 모두에 실망감이 컸어요. 모든 걸 놓고 떠나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요.”

○ 장애인 기업 대표로 변신

언론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그를 20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한 아파트형 공장에서 만났다. 중증 발달장애 등 정신지체 장애인 64명을 직원으로 채용한 장애인 기업 ‘베어베터’의 대표로 변신해 있었다. 베어베터는 고용노동부가 지정한 장애인 표준사업장으로, 기업의 교육 홍보물이나 명함을 제작하는 일을 주로 한다.

모든 일을 기계로 하는 다른 인쇄업체와 달리 책상에 잔뜩 둘러앉은 장애인 직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손으로 종이를 자르는 직원도, 명함 배달을 나가려 대기 중인 직원도 있었다. 배달을 나가기 전에는 사회복지사 직원에게 한참동안 설명을 들어야 했다. “2호선 신당역에서 내려야 해요. 어디라고요?”

퇴직 후 6개월 동안 원 없이 여행을 다녔던 그는 지난해 5월 이진희 베어베터 공동대표와 뜻을 모아 장애인 기업을 세우기로 했다. “처음엔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수익모델을 만들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8월에는 장애인 제도 관련 자료를 잔뜩 싸들고 혼자서 제주도 여행을 떠나 고민했죠.”

그는 장애인 연계고용 제도에서 답을 찾았다. 연계고용이란 장애인 의무 고용인원을 채우지 못한 기업이 장애인 기업의 제품을 구매하면 부담금을 최대 절반까지 감면해 주는 제도다. 기업은 장애인 고용 의무인원을 채우지 못하면 1인당 62만∼101만 원의 부담금을 내지만 상당수가 고용 대신 부담금을 선택한다. 이런 기업이 베어베터에 인쇄물을 맡기면 기업은 부담금을 아끼고, 베어베터는 장애인을 채용하고 수익도 올릴 수 있다. 김 대표는 이 모델로 NHN, IBM, 대림, 고려대 등과 거래해 월 1억 원의 매출을 올려 지난달부터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 제과 제빵, 커피원두 제공 등으로 사업 영역도 확장하고 있다.

여기서 일하는 정신지체 장애인 직원들의 월급은 약 100만 원. 직업 재활시설에서 일하는 장애인 평균임금(약 29만 원)의 3배 이상이다. 거의 대부분의 직원이 장애인이라는 것도 특징이다. 대형마트에서 짐 나르는 일을 하던 노현진 씨(29)는 “전 직장에선 열심히 일했지만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며 야단맞기 일쑤였는데 여기는 일하기가 훨씬 낫다”고 했다.

○ 사업 이해 못한 정부와 싸우기도

하지만 뜻하지 않은 곳에서 장애물이 등장했다. 노동부에서 명함 인쇄나 제과 제빵, 커피원두 제공 등의 사업이 연계고용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며 브레이크를 건 것이다. 연계고용의 대상을 지나치게 넓게 해석하면 자칫 기업이 직접고용 의무를 피할 수 있어 제한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김 대표는 “연계고용이야말로 정상적인 소통이 불가능한 정신 장애인을 고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며 기업의 직접고용만 고집하는 장애인 정책에 맞섰다. 정신지체 장애인 사업장인데도 휠체어 시설 등을 요구하는 앞뒤가 맞지 않는 규제도 여전했다. 오랜 승강이를 벌인 끝에 노동부는 결국 최근 관련 조항을 개정해 베어베터의 사업을 허용키로 했다.

김 대표는 베어베터의 사업을 키우는 데서 더 나아가 연계고용 사업모델 전파에 나섰다. 고려대, 학교법인 계원학원 등이 베어베터와 같은 장애인 기업 설립을 검토 중이다.

김 대표 주변에는 아직도 “버젓한 회사를 창업해 큰돈을 벌어야 할 사람이 왜 장애인 기업에 매달려 있느냐”고 그를 책망(?)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는 그럴 때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세상에 내놓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일이 가장 즐겁다”고 말한다.

김용석 기자 nex@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