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저 고통 속 글로벌 디플레 조짐… 수출 코리아 비상
엔화 약세로 수출 전선에 비상등이 들어온 가운데 일각에서는 한국경제가 저성장, 저금리와 함께 저물가, 저고용의 ‘4저(低) 불황’에 빠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성장률과 물가가 동시에 떨어지면 장기 디플레이션(Deflation·경기침체 속 물가 하락)의 늪에 빠졌던 일본처럼 경제에 심각한 상황이 초래될 수 있어서다.
○ 미국, 독일보다 낮아진 물가상승률
모두 한국은행의 중기 물가상승률 목표 범위인 2.5∼3.5%를 크게 밑도는 수준. 최근의 저물가 행진이 한국경제의 정상 궤도를 벗어나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는 뜻이다. 주요 선진국에 비해 통상 1∼2%포인트 높던 한국의 물가상승률은 올해 1분기(1∼3월)에 작년 동기 대비 1.4% 상승하는 데 그쳐 영국(2.8%) 미국(1.7%) 독일(1.5%)보다 낮아졌다.
물가상승률이 급락하는 데는 경기 불확실성에 따른 소비 둔화가 큰 몫을 하고 있다. 올 들어 대대적인 할인 행사에 들어갔던 대형마트의 매출액은 3월 ―4.4%(전년 동기 대비), 4월 ―9.8%로 갈수록 뒷걸음질치고 있다. 반짝 증가세를 보였던 백화점 매출 역시 4월 들어 ―1.9% 감소했다. 문제는 여력이 없어 소비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1분기 가계가 벌어들인 소득에서 세금 등을 뺀 처분가능소득은 가구당 339만 원. 이 중 저축 능력을 보여 주는 흑자액은 84만8000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0.8% 늘었다. 쓸 돈이 없어서 지출을 줄인 것이 아니라 불황에 대비해 허리띠를 졸라매는 가구가 늘고 있는 것이다.
물가상승률 하락에는 무상복지 확대로 인한 제도적 요인, 국제 원자재 가격 하락 등 공급요인도 작용했다. 4월 생산자물가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2.8% 하락하면서 2009년 10월 이후 최대 하락폭을 보였다. 지난해 10월 이후 7개월 연속 하락세다.
KDI 관계자는 “물가상승률 둔화에는 공급 측 요인이 컸지만 점차 수요 위축의 영향이 커지고 있다”며 “추가경정예산 편성 등으로 소비가 개선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수출 여건 등이 여전히 좋지 않아 소비 둔화가 지속될 우려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최근 물가상승률 하락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 전체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1분기 34개 회원국의 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기 대비 1.7%로 2년 반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특히 재정위기의 여파로 극심한 경기침체를 겪고 있는 유럽에서는 디플레이션이 전염병처럼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일본처럼 장기 디플레이션을 겪고 있는 스위스와 함께 그리스, 스웨덴의 물가상승률이 최근 마이너스로 떨어졌으며 프랑스와 포르투갈, 아일랜드 등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유럽 국가 역시 0%대 물가상승률이 시간이 갈수록 0에 근접하며 낮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 역시 4월 물가상승률이 2.4%에 그치면서 연중 목표치 3.5%를 크게 밑도는 등 신흥국 역시 물가상승률이 하락하고 있다.
글로벌 경제의 디플레이션 우려는 한국경제에는 대형 악재다. 가뜩이나 미약한 글로벌 경기 회복세가 디플레이션으로 부진에 빠지면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도 경기 부진이 더욱 장기화될 소지가 크다.
일부 경제 전문가들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한국의 성장률이 2% 중반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경기 위축으로 인한 디플레이션까지 나타나면 한국경제가 유례없는 ‘4저 현상’(저성장, 저금리, 저물가, 저고용)에 빠져 장기 불황에 접어들 수 있다고 우려한다. 지금 같은 경기침체 속에서는 적당한 물가 상승이 오히려 경기에 도움이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