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국립창극단 ‘메디아’ ★★★★☆
2500년 전 그리스 비극에 한국적 창극의 몸을 입히면서 강렬한 볼거리와 에너지로 창극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국립창극단의 ‘메디아’. 메디아 역을 맡은 창극 스타 박애리(가운데)가 권력욕을 위해 자신을 이용만 하고 버리려는 남편 이아손의 새 신붓감 크레우스 공주(오른쪽)에게 특별한 독을 바른 결혼예복을 선물해 크레우스 공주는 물론이고 딸을 구하려고 달려든 아버지 크레온 왕(왼쪽)까지 불태워 죽이는 장면. 그 뒤의 배우들은 코러스다. 국립극장 제공
앞의 두 작품과 달리 ‘메디아’는 2500년 전 그리스 비극이 원작이다. 창극은 우리 전통의 판소리를 서양 연극과 접목해 탄생한 근대적 장르. 하지만 그리스 비극에서 배우들과 대사를 주고받으며 코러스를 이끄는 코러스장과 창극에서 극의 안내자이자 해설가 역할을 노래로 풀어가는 도창(導唱)의 역할은 매우 닮았다. 극작가 한아름과 연출가 서재형 부부는 이런 형식적 유사성과 메디아에 담긴 여인네의 한(恨)이라는 내용적 유사성을 엮어 매우 현대적인 창극을 빚어냈다.
메디아는 ‘여성판 오이디푸스’다. 오이디푸스가 아비를 살해하고 어미와 관계를 맺은 ‘지상 최악의 남자’라면, 메디아는 사랑 때문에 친정 아비를 배신하고 남동생을 죽이고 끝내는 그 사랑의 배신에 분노해 자신이 낳은 두 자식마저 살해한 ‘지상 최악의 여자’다.
창극 ‘메디아’는 그 연장선상에 서 있다. 남편 이아손의 권력욕에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 불쌍한 여인에게 초점을 맞췄다. “세월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법칙. 죄를 짓는 것은 남자. 하지만 벌을 받는 것은 여자”라고 코러스가 반복해 부르는 가사가 이를 함축한다.
창극은 그에 대한 메디아의 복수를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게 한다’는 한국적 여인의 한으로 형상화한다. 여기서 한아름 서재형 커플의 장기이자 단점이었던 신파조의 대사가 질적 변화를 일으킨다. 인간의 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거대한 비극의 에너지가 청승맞은 신파조의 눈물을 증발시켜 버리면서 피를 토하는 듯한 메디아의 절규가 무겁게 객석을 엄습한다.
메디아 역을 맡은 박애리의 존재감도 빛을 발한다. 세 살된 딸을 둔 박애리는 너무도 사랑하기에 죽일 수밖에 없었던 자식들에 대한 절절한 모정을 실감나는 노래로 신들린 듯 연기한다. 배우로서 박애리의 재발견이라 할 만하다.
작곡가 황호준이 작곡과 작창(作唱)을 겸한 음악은 국악과 양악이 묘하게 뒤섞여 극적 긴장감과 비극성을 한껏 드높였다. 코러스의 합창은 바그너의 장엄한 악극을 연상시켰지만 주연급 배우들의 독창은 구성진 우리 창극의 묘미가 살아났다.
메디아가 이아손의 새 신부가 되려는 크레우사 공주와 그의 아버지 크레온 왕을 독살하는 장면에서 부녀가 붉은색 천을 양손에 팽팽히 움켜쥐고 맴도는 장면, 메디아가 눈물을 머금고 어린 두 아들을 죽이는 순간 아들 역을 연기하던 배우들의 의상이 검은색에서 붉은색으로 바뀌는 장면, 그리고 그 순간 붉은색 검이 무대 천장에서 바닥을 관통하는 장면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