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자니 까다롭고… 버리자니 욕먹고… 전통 앞의 딜레마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의 지붕은 전통 갓 모양에서 따온 것으로 전통을 잘못 해석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평가에 참여한 일부 건축 전문가는 “누려볼수록 여유 있고 행복한 공간”이라고 호평했지만 반대표가 더 많아 최악의 현대건축 2위에 올랐다. 동아일보DB
“유산은 이어 받을 수 있고, 이어 넘길 수도 있으나 전통은 이어 받을 수도, 이어 넘길 수도 없다. 내 전통 내 시대의 고유한 것이라 하겠다. 즉 자신들이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1977년 5월 25일자 동아일보에서 건축가 김수근은 계몽의 시대를 주도하는 사상가답게 전통의 의미를 이렇게 전위적으로 일깨운다. 전통이란 선대의 유산을 바탕으로 당대가 새롭게 창조해야 하는 것.
전주 풍남문을 콜라주한 듯 보이는 전주시청사와 기념성을 과장된 스케일의 역사 양식으로 표현한 독립기념관이 대표적 사례이다. 또 국립민속박물관은 아예 현상설계 때 전통건축의 모사를 조건으로 내세워 전통의 본질에 위배되는 문화적 퇴행을 부추겼다는 죄목으로 두고두고 욕을 먹고 있다.
고려시대 건축물인 수덕사 대웅전을 본떠 지은 맞배지붕의 독립기념관(위 사진).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 법주사 팔상전, 금산사 미륵전 등 한국 전통 건축 양식을 모아놓은 국립민속박물관(아래 사진). 동아일보DB
1970, 80년대를 겪은 한국 건축가라면 누구라도 전통과 한국성에 대한 강박을 경험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라는 핍박과 상실의 시간에 대한 반대급부로 우리는 단절된 민족문화의 정체성과 전통에 천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전통은 순수한 학문적 담론이기에 앞서 국가통치의 문화적 이데올로기로서 만들어진 강압적 주제이기도 했다. 전국의 수많은 공공시설과 문화시설은 프로파간다로서 국민에게 군사정부의 권위와 역사적 정통성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임무를 하달받고 기능에도 적합하지 않은 옛 양식으로 몸을 치장해야 했다. 그러니 이때의 전통이란 형식은 과장되고 내용은 피상적일 수밖에.
그렇다고 이를 마냥 멀리할 것도 아니다. 최고의 현대건축에 이름을 올린 공간사옥(1위·김수근·1977년)과 프랑스대사관(2위·김중업·1962년), 절두산순교성지(6위·이희태·1967년), 수졸당(19위·승효상·1993년) 등은 전통을 현대적 언사로 번안하는 데 성공해 그 영광을 차지하지 않았던가.
예전에는 젊은 건축가들이 자기 건축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거칠고 제멋대로라도 전통을 말하고 표현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지만 국제화라는 토양 속에 뿌리를 내린 요즘 젊은 건축가들은 도통 전통이란 말을 꺼내지 않는다. 앞선 건축가들이 전통을 표현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면, 반대로 오늘날 우리는 전통과 한국성에 대한 어떤 뚜렷한 결론도 갖지 못한 상황 속에서, 전통을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된다는 또 다른 강박에 휩싸여 있는 것 같다.
서두에 김수근의 말처럼 전통의 창조성은 결국 시대와 주체의 문제이다. 전통은 ‘과거’가 아닌 ‘지금’, ‘우리’가 아닌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자면 욕 좀 먹고 실패를 경험하더라도 우리는 강박에서 벗어나 전통을 자유롭게 고민할 줄 알아야 한다. 무엇이 본질이고 아닌지에 대한 정답은 없다. 양식이든 재료이든, 공간이든 배치이든 모든 편견과 구속에서 벗어나 ‘나’를 중심에 두고 사고할 때 천년의 유산이 탄생할 것이다.
박성진 월간 ‘SPACE’ 편집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