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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의 과잉충성이 박정희를 위기로 몰다

입력 | 2013-05-29 03:00:00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36>인연 2




김지하(앞줄 가운데 앉은 사람)는 1972년 비어 필화사건으로 마산요양원에 강제연금되었을 당시에도 성당에서 연극을 올리는 등 문화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사진은 공연이 끝난 어느 날 찍은 것. 김지하 제공

다시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말이다.

“‘비어’가 발표되자 중앙정보부 내 공기가 매우 험악해졌다. 김지하가 오적 이후 ‘조용히 있겠다’고 정보부에 약속한 것도 아니었는데 ‘김지하가 정부를 배신했다’고 비난하는 간부들도 많았다.”

이 전 원장은 “이번에 김지하가 다시 붙잡히면 죽을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섬뜩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대통령 측근들의 과잉 충성 분위기가 나라를 위기로 몰아가고 있었다. 마음 한편에 이를 지켜보는 것이 못내 못마땅했다”고 한다. 그의 회고다.

“내가 무슨 거창한 민주화운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더 넓은 의미의 국가 이익을 위해서 김지하를 살려야 한다고 보았다. 당시 프랑스도 사르트르(1905∼1980)의 반정부 시위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런데 수사기관장이 드골 대통령에게 ‘사르트르를 잡아넣어야 한다’고 하자 드골이 뭐랬는 줄 아는가, ‘그래도 내가 볼테르(1694∼1778)를 구속할 수는 없지’ 했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사르트르를 볼테르라는 당대 지성에 비유하면서 지성인을 잡아넣으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나는 (71년) 대선에서도 이겼으니 우리 지도자 가슴도 좀 크게 국민들에게 보여 줄 필요가 있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정보부 내 분위기는 그런 것이 전혀 아니었다.”

정보부는 김지하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됐다. 남자고 여자고 선배고 후배고 김지하와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는 주변 사람들이 무려 200여 명이나 붙들려가 적게 혹은 크게 피해를 입었다.

자신 때문에 남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며 김지하도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이 전 원장은 김지하에게 자수를 권했다.

김지하는 고민 끝에 제 발로 남산에 걸어 들어가기로 한다. 서울대 불문학과 60학번으로 김지하의 문리대 후배이면서 훗날 ‘무진기행’을 쓴 소설가 김승옥은 ‘내가 만난 하나님’이란 책에서 김지하가 자수를 결심하던 당시 상황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피해 다니던 김지하는 마지막에 나를 찾아와 ‘더이상 숨어 지낼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내 소재를 대라는 당국의 요구에 고통을 받고 있다. 박정희가 나를 죽일 작정인 것 같다. 내일 자수해서 남산(중앙정보부)으로 들어갈 테니 네가 밖에서 문인들을 모아 내 구명운동을 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김지하가 ‘남산’으로 들어가고 난 뒤 김승옥은 박태순, 이문구 등 문인들을 끌어 모아 구명운동을 벌였다. 또 한승헌, 황인철 변호사와 함께 재판 때마다 변호사 측 증인이 되어 김지하를 빨갱이로 몰려 하는 검찰을 향해 “그의 평소 언행으로 볼 때 빨갱이가 아니다”라고 증언했다. 다시 김승옥의 회고다.

“결국 나에게까지 감시가 붙었다…문인들에게는 참으로 황막한 시대였다. 불안과 좌절 때문에 술만 늘었다. 나는 선천적으로 술을 못했는데도 술에 의지하게 되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이라도 마시고 있으면 그나마 불안을 벗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지하는 결국 72년 5월 13일 반공법 위반혐의로 다시 입건된다. 김지하의 말이다.

“막상 잡혀 들어갔지만 뺨 한 번 맞거나, 욕설 한마디 듣는 일 없이 점잖게 취조를 받았다. 어머니까지 면회를 시켜줬다. 하기야 내가 무슨 비밀 조직을 만든 것도 아니고 혼자서 시를 써서 공개해 걸린 것이니 혐의 사실(?)이 분명한 데다 이미 세간에 알려진 사람이다 보니 보는 눈들이 많아 그랬던 것 같다.”

김지하는 조사가 끝난 뒤 폐결핵을 이유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마산 국립결핵요양원으로 옮겨진다.

“말이 요양이지 강제연금생활이었다. 정문엔 정보부원이 배치됐고 결핵원 건물 사방에 탱자나무 울타리가 둘러쳐졌다. 그야말로 ‘위리안치’(圍籬安置·유배된 죄인이 거처하는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쳐 가두는 일)였다.”

이번에는 이 전 원장 말이다.

“마산 요양원에서도 김지하는 자유를 누렸다. 비록 감시하에 있었지만 마음대로 술도 먹고 그의 근성대로 정권에 대해 악담을 퍼붓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를 감시하던 경찰이나 정보부원은 오히려 젊고 정의감이 있는 이 괴짜에게 외경(畏敬)감을 표하지 않는가?”

이후 김지하와 이 전 원장의 인연은 잠시 끊긴다. 73년 이 전 원장이 주영국 한국대사관에 부임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전 원장은 74년 김지하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영국에서 들었을 때 가슴이 답답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김지하가 당시부터 국제적인 인물이었다며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전했다.

“74년 민청학련 사건이 나고 어느 날 런던에 있는 대사관으로 협박장이 하나 왔다. ‘시인 김지하를 사형에 처하면 당장 대사관을 폭파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보고를 받은 김용식 대사가 나에게 시급히 영국 공안당국과 협조해 달라고 당부했다. 나는 영국 외무부와 특별범죄 수사부에 협조를 요망했다. 그날로 대사관에 대(對)테러부대 요원이 배치되고, 무장대원들이 탄 자동차가 대사관 인근에 24시간 대기하게 됐다.”

이 전 원장이 귀국했을 때 김지하는 이미 갇힌 몸이었다. 이 전 원장은 “이후 옥중에서나 출옥 후 보여준 김 시인의 행동은 정말 감동적인 것이었다”고도 말한다.

“가장 찬란한 인생의 황금 시절을 암울한 감옥에서 보낸 그는 정보부에서 자신을 인혁당 사건과 연결시키고, 가톨릭교계에 침투한 마르크스 레닌주의자로 둔갑시키려 한 것에 대해 끝까지 버텼다. 자신이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친북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는 일은 당시 분위기에서는 참으로 어려운 처신이었다. 운동권 내에서 왕따 당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전 원장은 그가 겪었을 고초가 전해지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정부 내 강경파들만 그를 빨갱이로 몰아 죽이려 한 것이 아니었다. 운동권 내에서도 그를 희생양으로 만들어 죽이려했다. 나는 훗날 이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지하는 형무소 안에서도 많은 압력을 받았다. 박 정권에 대해 더욱더 강렬하게 반항적인 작품을 쓰라는 지령(?)도 있었고, 사상적으로 완전 좌편향된 글을 발표하라는 요구도 받았다. 김지하는 이를 과감히 거절했고 자기를 비판하는 운동권 투사들에게도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런 진상에 대해 김 시인 자신은 아직까지도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나는 대강을 짐작한다.”

이 전 원장은 “김지하를 빨갱이, 친북주의자로 알고 있던 내 후배들이 ‘왜 그런 사람을 변호하느냐’며 오히려 나를 의심하던 날도 많았었는데 요즘 들어 오해가 풀리고 있는 것이 정말 다행스럽다”고 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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