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37>추기경
1969년 5월 30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대한민국 최초의 추기경이 되는 김수환 추기경(오른쪽). 생전에 “교회의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며 말과 행동을 하나로 일치시키며 살아온 추기경은 억압된 시절 국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 큰 어른이었다. 동아일보DB
“우리는 향후 운동방향을 놓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지 주교가 ‘여러 정황으로 보아 천주교가 일어나야 독재를 막고 민주화운동이 국민의 지지를 더 많이 받을 것 같다.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전국의 사제들을 하나의 조직으로 단합시켜야 한다’고 했다. 정의구현사제단에 대한 구상이 이날 처음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며칠 후 김수환 추기경도 그를 찾아왔다.
김지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서 꾸벅 인사를 했다.
“추기경을 뵌 것은 그날 처음이었지만 사진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추기경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내게 ‘김 시인이지요?’라며 악수를 청했다. 그러고 나서는 갑자기 목에 감겨있던 흰 로만 칼라를 잡아떼어 버렸다. 순간, 나는 너무 놀랍기도 하고 감동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바티칸 계급장’을 떼어 놓고 마음을 열고 싶다는 뜻으로 읽혀졌기 때문이다.”
추기경은 음악회가 끝난 뒤 김지하의 병실을 찾았다. 이날 두 사람은 밤을 새워가며 이야기를 나눴다고 김지하는 말한다.
“너무도 소탈하고 소박하고 진실한 분이셨다. 우리는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는 사회분위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추기경께서 먼저 내게 물으셨다. ‘우리는 분단국가다. 가톨릭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김 시인이 ‘오적’에 이어 가톨릭잡지인 ‘창조’ 지에서 ‘비어’로 다시 칼을 뺐다…이 분단된 나라에서 가톨릭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는가. 우리까지 나서서 정부를 반대하면 큰 혼란이 오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다.’”
추기경의 질문에 김지하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박정희 정권은 우리 역사 이래로 가장 독한 정권입니다. 쉽게 망하지 않습니다. 망한다 해도 그 뒤에 똑같은 놈들이 또 나옵니다. 가톨릭이 아무리 보수적이라 해도 가톨릭의 존재 이유는 통일을 위해 있는 겁니다. 그렇다고 북한과 가톨릭이 통일문제에 대해 툭 털고 대화할 수 있습니까. 북한은 그야말로 극좌입니다. 그것도 소아병적 극좌입니다.”
당시를 전하던 그의 말이 잠시 끊기더니 다시 이어졌다.
“추기경께서 두 눈을 감으시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셨다. 얼굴 표정이 무거워졌다. 나도 비통한 심정이었지만 이렇게 말했다. ‘가톨릭이 민주주의를 위해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종교는 문화와 다릅니다. 박정희에게 계속 얻어맞으면서 가톨릭인들의 젊은 힘을 모아 나라를 위해 나서야 합니다. 사회에서 소외된 민중들을 외면해선 안 됩니다. 가톨릭의 나아가야 할 방향과 가치는 민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통일에 있습니다.”
“추기경님은 내가 만나본 내 위쪽의 어른 세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고도로 세련된 지성과 풍부한 감성을 가진 분이었다. 나는 그 뒤로도 서울 외곽의 수도원에서 밤샘하며 추기경님과 여러 번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느꼈던 감정을 한마디로 줄이라면 이렇게 표현하겠다. ‘우리 생전에 이런 분과 함께 숨쉬며, 동시대를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다’”
그가 요양원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외국인들도 많았다. 김지하는 당시 일본에도 많이 알려진 유명 인사여서 일본 기자들과 양심적 지식인들이 병원을 찾았다. 면회를 허락하지 않으면 일본 내 여론이 나빠질 것을 염려한 중앙정보부는 이들의 면회를 허용했다. 김지하는 “당시 나를 찾아온 일본인들 중에 교도통신 한국특파원 히시키 기자와 교토대학 철학교수 쓰루미 �스케 선생(1922∼·일본의 저명한 사상가이자 철학자)이 가장 기억이 난다”고 했다. 히시키 기자와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갑자기 대화를 나누다 말고 그가 허리에 차고 있던 전대를 풀어 안을 보여주었다. 달러가 가득 들어있었다. 놀라는 내게 하는 말이 ‘마음이 있으면 중국으로 밀항하라. 도와주겠다’고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좀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마음을 써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그에게 ‘내 조국을 버릴 수 없다’고 말했다.… 쓰루미 선생은 당시 베트남 전쟁 반전단체를 이끌고 있었는데 ‘일본의 양심’으로 불리며 수많은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던 철학자요, 사상가였다. 그도 나를 찾아와 수많은 일본인들이 서명한 ‘김지하 석방 탄원서’를 내밀며 힘을 내라고 격려해주었다. 국경을 넘어서, 반일감정을 넘어서 진한 우정이 느껴졌다. 나는 그에게 감사 인사와 함께 이렇게 말했다. ‘You can not help me, I can help your movement by my resistance!’(당신은 나를 도울 수 없다. 내가 저항을 통해 당신들의 운동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내 나름대로 결연한 저항의지를 표현한 말이었다. 선생은 고개를 끄떡이며 내 말에 동의해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원주까지 들러 지 주교까지 만나고 일본으로 가셨다.”
72년 5월 31일에 입건된 김지하는 두 달이 채 못 되는 7월 15일 연금에서 풀려나 원주로 돌아간다. 주교관 터에 딸린 작은 기와집 한 채를 고쳐 부모와 함께 새 둥지를 틀었다. 교구청 기획실 기획위원으로도 다시 복직되었다. 실로 오랜만에 다시 찾아온 평화였다.
혼자 거리를 걷거나 골목을 다니거나 논밭길, 산길을 쏘다녔다. 저녁 무렵엔 순간순간 변해가는 치악산의 산빛들을 멍하니 바라본 적도 많았다. 때로 낚시질을 하며 친구나 지인들과 붕어 찌개를 안주삼아 소주를 마시며 정치와 예술, 철학과 종교를 얘기했다.
방에서 불을 때고 뜨끈한 방구들에 등을 대고 누우면 슬며시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운명적인 인연의 실타래가 꿰어지고 있었으니 그가 ‘비어’를 쓰기 직전인 71년 가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