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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 콜럼버스보다 500년 빨랐다

입력 | 2013-05-30 03:00:00

[신문과 놀자!/조지형 교수의 역사에세이]유럽인의 아메리카 발견




콜럼버스가 1492년에 신대륙을 발견? 지금도 많은 사람이 이렇게 믿지만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아메리카는 콜럼버스가 발견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대서양을 건너오기 훨씬 전, 적어도 1만2000년 전부터 아메리카에 원주민이 살았으니까요. 우리 조상들이 수천 년간 한반도에서 살았는데, 한반도를 방문한 어떤 외국인이 한반도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면 여러분은 기분이 좋을까요? 그리고 이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역사적 사실로 안다면 여러분은 기분이 좋을까요? 사실을 왜곡하는 일이니 비난과 분노의 대상이 될 겁니다.

그렇다면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한 최초의 유럽인일까요? 아닙니다. 콜럼버스보다 약 500년 전에 이미 아메리카에 발을 내디딘 유럽인이 있었습니다. 노르드인입니다. 흔히 바이킹이라고 부릅니다. 스칸디나비아 출신인 바이킹은 뛰어난 선박 제조기술과 항해술 덕분에 약탈과 해적질을 일삼았지만 평화적인 무역활동을 활발히 펼쳤습니다. 서유럽은 물론이고 오늘날의 이스탄불과 바그다드까지 진출하여 거래를 했고, 아랍 상인에게서 인도의 향신료와 중국의 비단을 구입했습니다.

오늘날의 지구온난화처럼 기후변화로 지구가 따뜻해지자 얼어붙었던 땅인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는 9세기 중엽부터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곳이 됐습니다. 바이킹은 얼음의 땅인 아이슬란드에 정착했습니다. 머리카락 색이 붉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붉은 에이리크의 아버지는 범죄 때문에 노르웨이에서 추방되어 아이슬란드로 쫓겨 갔습니다. 그 후 붉은 에이리크 역시 자기의 노예를 죽인 사람을 보복 살인했다는 이유로 추방되어 그린란드로 옮겼습니다.

그린란드를 식민화하려는 노력이 번번이 실패했지만 붉은 에이리크는 그린란드를 3년간 세밀하게 탐험한 끝에 동부 정착촌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따뜻한 기후 덕분에 그린란드에는 서부 정착촌이 건설됐고 농작물 재배가 가능해졌습니다. 그린란드 정착촌은 노르웨이와 꾸준히 상업 및 문화 교류를 이어갔습니다. 심지어 로마의 주교구 조직에 편입되어 그린란드 주교가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붉은 에이리크의 아들인 레이프 에이릭손은 노르웨이에 갔다가 그린란드로 돌아오는 길에 기존의 항로에서 벗어나 북아메리카에 가게 됐습니다. 레이프는 그곳에 포도가 자란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린란드 서쪽에 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제는 사실로 믿게 된 겁니다. 그리고 난파되어 조난당한 두 사람을 구출해 그린란드로 돌아왔습니다.

레이프는 본격적으로 탐험대를 조직해 북아메리카를 조사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캐나다에서 제일 큰 섬인 배핀 섬, 산림이 울창한 래브라도, 그리고 마침내 ‘포도주의 땅’이라는 뜻의 빈란드를 탐험했습니다. 빈란드는 오늘날의 캐나다 뉴펀들랜드 지역입니다. 이곳에서 겨울을 보내고, 그는 좋은 목재와 포도를 싣고 그린란드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탐험 이야기를 들은 많은 바이킹이 거기로 이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빈란드의 정착촌이었던 랑스오메도에서 바이킹의 유물과 유적이 1960년대에 대거 발견됐습니다. 집터, 냄비, 난로 흔적, 녹슨 못, 물레 추로 추정되는 구멍 뚫린 작은 돌. 랑스오메도 인근의 다른 바이킹 정착촌에서는 대장간 터와 화덕, 철광석이 나왔죠. 방사능탄소측정법으로 살펴보니 이들의 제작 연대는 1000년경으로 추정됐습니다. 레이프가 빈란드를 탐험한 시기와 일치합니다.

사실 빈란드는 포도가 자랄 수 없는 지역이고 실제로 포도가 재배된 적이 없습니다. ‘포도주의 땅’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랑스오메도에서 호두의 일종인 버터넛이 발견됐습니다. 버터넛은 뉴펀들랜드 지역에서 전혀 자라지 않습니다. 랑스오메도의 남쪽에 있는 뉴브런즈윅 지역에서 자라는 나무이고, 이곳에는 야생포도가 많습니다. 말하자면 랑스오메도는 뉴브런즈윅의 남쪽 지역까지 진출했던 바이킹의 전초기지였던 셈입니다.

빈란드의 정착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바이킹은 이곳에 살던 아메리카 원주민과의 갈등 때문에 전쟁을 치르게 됐습니다. 레이프의 남동생과 여동생이 별도의 원정대를 꾸려 빈란드에 왔지만 결국 원주민에게 패해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바이킹은 뛰어난 항해술을 가졌지만 그들의 좁고 긴 선박으로는 많은 사람을 수송해 올 수 없었습니다. 출발지였던 그린란드는 빈란드 정착촌을 지키기 위해 충분한 인력과 경제력, 군사력을 지속적으로 제공할 만큼 부유하지 못했습니다. 또 탐험에 따른 이익을 선점하려는 욕심 때문에 원정대가 내부적으로 분열하여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습니다.

빈란드가 폐쇄된 이후에도 래브라도와 배핀 섬의 바이킹 정착촌은 계속 유지되어 14세기까지도 목재와 모피의 교역이 이뤄졌습니다. 15세기에 날씨가 매우 추워지면서 바닷길이 얼어붙고 땅이 척박해지자 그린란드에서도 철수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바이킹 역사의 흔적은 아이슬란드에까지 남았습니다. 최근 아이슬란드 주민의 DNA를 검사한 결과 최소한 1700년 이전에 살았던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의 후손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붉은 에이리크와 레이프의 탐험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다가 마침내 13세기에 문자화되어 ‘붉은 에이리크의 영웅 이야기’와 ‘그린란드인들의 영웅 이야기’에 실렸습니다. 이들은 아메리카를 발견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유럽인으로서 아메리카를 처음 발견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조지형 교수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