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조지형 교수의 역사에세이]유럽인의 아메리카 발견
그렇다면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를 발견한 최초의 유럽인일까요? 아닙니다. 콜럼버스보다 약 500년 전에 이미 아메리카에 발을 내디딘 유럽인이 있었습니다. 노르드인입니다. 흔히 바이킹이라고 부릅니다. 스칸디나비아 출신인 바이킹은 뛰어난 선박 제조기술과 항해술 덕분에 약탈과 해적질을 일삼았지만 평화적인 무역활동을 활발히 펼쳤습니다. 서유럽은 물론이고 오늘날의 이스탄불과 바그다드까지 진출하여 거래를 했고, 아랍 상인에게서 인도의 향신료와 중국의 비단을 구입했습니다.
오늘날의 지구온난화처럼 기후변화로 지구가 따뜻해지자 얼어붙었던 땅인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는 9세기 중엽부터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곳이 됐습니다. 바이킹은 얼음의 땅인 아이슬란드에 정착했습니다. 머리카락 색이 붉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붉은 에이리크의 아버지는 범죄 때문에 노르웨이에서 추방되어 아이슬란드로 쫓겨 갔습니다. 그 후 붉은 에이리크 역시 자기의 노예를 죽인 사람을 보복 살인했다는 이유로 추방되어 그린란드로 옮겼습니다.
붉은 에이리크의 아들인 레이프 에이릭손은 노르웨이에 갔다가 그린란드로 돌아오는 길에 기존의 항로에서 벗어나 북아메리카에 가게 됐습니다. 레이프는 그곳에 포도가 자란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린란드 서쪽에 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제는 사실로 믿게 된 겁니다. 그리고 난파되어 조난당한 두 사람을 구출해 그린란드로 돌아왔습니다.
레이프는 본격적으로 탐험대를 조직해 북아메리카를 조사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캐나다에서 제일 큰 섬인 배핀 섬, 산림이 울창한 래브라도, 그리고 마침내 ‘포도주의 땅’이라는 뜻의 빈란드를 탐험했습니다. 빈란드는 오늘날의 캐나다 뉴펀들랜드 지역입니다. 이곳에서 겨울을 보내고, 그는 좋은 목재와 포도를 싣고 그린란드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탐험 이야기를 들은 많은 바이킹이 거기로 이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빈란드의 정착촌이었던 랑스오메도에서 바이킹의 유물과 유적이 1960년대에 대거 발견됐습니다. 집터, 냄비, 난로 흔적, 녹슨 못, 물레 추로 추정되는 구멍 뚫린 작은 돌. 랑스오메도 인근의 다른 바이킹 정착촌에서는 대장간 터와 화덕, 철광석이 나왔죠. 방사능탄소측정법으로 살펴보니 이들의 제작 연대는 1000년경으로 추정됐습니다. 레이프가 빈란드를 탐험한 시기와 일치합니다.
사실 빈란드는 포도가 자랄 수 없는 지역이고 실제로 포도가 재배된 적이 없습니다. ‘포도주의 땅’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랑스오메도에서 호두의 일종인 버터넛이 발견됐습니다. 버터넛은 뉴펀들랜드 지역에서 전혀 자라지 않습니다. 랑스오메도의 남쪽에 있는 뉴브런즈윅 지역에서 자라는 나무이고, 이곳에는 야생포도가 많습니다. 말하자면 랑스오메도는 뉴브런즈윅의 남쪽 지역까지 진출했던 바이킹의 전초기지였던 셈입니다.
빈란드가 폐쇄된 이후에도 래브라도와 배핀 섬의 바이킹 정착촌은 계속 유지되어 14세기까지도 목재와 모피의 교역이 이뤄졌습니다. 15세기에 날씨가 매우 추워지면서 바닷길이 얼어붙고 땅이 척박해지자 그린란드에서도 철수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바이킹 역사의 흔적은 아이슬란드에까지 남았습니다. 최근 아이슬란드 주민의 DNA를 검사한 결과 최소한 1700년 이전에 살았던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의 후손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붉은 에이리크와 레이프의 탐험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다가 마침내 13세기에 문자화되어 ‘붉은 에이리크의 영웅 이야기’와 ‘그린란드인들의 영웅 이야기’에 실렸습니다. 이들은 아메리카를 발견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유럽인으로서 아메리카를 처음 발견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조지형 교수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