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와 무관했던 中企가 현대車 핵심 협력업체로 거듭나기까지
20일 경기 용인시 현대모비스 중앙연구소에서 현대모비스 재료연구팀의 김주현 연구원과 이근형 책임연구원, 협력업체인 우창산업의 양봉근 개발총괄 이사, 김형율 에프티이앤이 아시아지역담당 부장(왼쪽부터)이 공동 개발·생산한 ‘벤트 캡’을 장착한 헤드램프를 살펴보며 회의를 하고 있다. 현대모비스 제공
2010년 1월 대구 달서구 파호동의 작은 공장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국내 최대 자동차부품회사의 책임연구원이었다. 박종철 에프티이앤이 대표는 뜻밖의 제의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가 경영하는 회사는 아웃도어 의류업체에 기능성 섬유소재를 공급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임직원은 80여 명이었다.
‘대기업에서 왜 이런 제의를 했을까. 괜히 감당 못할 일에 뛰어드는 것은 아닐까. 혹시 기술만 가져가면 어쩌지?’ 수많은 생각이 박 대표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으로선 성공 여부가 불투명한 제품의 개발에 수년간 매달리는 게 큰 부담이었다.
○ 관행 깬 역(逆)제안
2009년 현대모비스 기술연구소 재료연구팀의 이근형 책임연구원은 자동차의 헤드램프(전조등)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램프 안으로 물이나 먼지가 유입되지 않게 차단하고 공기만 통하게 하는 벤트 캡(vent cap)의 국산화를 검토하고 있었다. 나노기술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자동차 램프에 들어가는 통풍 소재에 주목하고 있었다. 벤트 캡은 야간 주행 시 안전과 직결된 램프의 성능을 좌우하는 필수 부품이다. 통풍 성능이 떨어지면 램프에 김이 서린다. 당시 벤트 캡은 전량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이 연구원은 해외 부품소재 전시회를 둘러보던 중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벤트 캡에 나노 섬유를 써보면 어떨까?’ 기능성이 뛰어난 나노 섬유를 소재로 쓰면 성능이 개선되고 염원하던 국산화도 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듬해 이 연구원은 수소문 끝에 에프티이앤이를 찾아내 전화를 걸었다. 관행을 깨고 대기업 측에서 중소기업에 먼저 개발을 제안한 것이다.
○ 실험, 또 실험
자동차 한 대에는 2만여 개의 부품이 들어가고, 모든 부품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부품 하나라도 고장이 나면 걷잡을 수 없는 품질 문제로 번진다. 새로운 부품을 개발하기 위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점검해야 했다.
현대모비스와 에프티이앤이 연구진은 2주일에 한 번씩 모여 머리를 맞댔다. 에프티이앤이가 개발한 나노 섬유는 기능성이 뛰어났지만 그대로 자동차부품에 쓰는 건 쉽지 않았다. 숱한 실패 끝에 다른 합성소재를 덧대 내구성을 높이는 방법을 찾아냈다.
두 회사 연구진은 2011년 말 마침내 자체 개발한 나노 소재를 적용한 벤트 캡을 완성했다. 시제품이 나오던 날, 현대모비스는 에프티이앤이 측에 깜짝 제안을 했다. “이 제품을 공동 특허로 등록합시다. 함께 거둔 결실이니까요.”
두 회사가 함께 개발한 벤트 캡은 1년여의 대량생산 준비과정을 거쳐 이달 초 출시된 현대자동차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뉴 투싼ix’에 처음으로 장착됐다. 현대모비스의 1차 협력사인 우창산업이 생산을 맡았다. 연구개발과 양산화 과정을 더해 총 3년간의 노력이 드디어 빛을 본 것이다.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신제품 개발이 결실을 거두지 못하는 일은 흔하다. 이근형 연구원 또한 다른 협력업체와 함께 개발에 매달렸지만 빛을 보지 못한 경험이 많다. 이 때문에 이 연구원은 개발기간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중소기업은 대기업과 달리 많은 돈과 시간이 들어가는 연구개발에 한번 실패하면 큰 충격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품 양산에 성공한 뒤 함께 고생한 협력업체 직원들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어 기뻤다고 했다. 이 연구원은 “앞으로도 기술력을 갖춘 다양한 중소업체를 발굴해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 있다면 연구원으로서 그보다 보람된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진석 기자 gen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