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창신동은 풍광이 좋아 양반들의 별장이 많았다. 조선조 이수광은 이곳에서 ‘지봉유설’을 썼다. 일제강점기에는 채석장으로 사용되어 조선총독부 건물 등에 들어간 석재들을 공급했다. 6·25전쟁이 끝나자 대규모 인구 유입이 이뤄졌다. 1957년 기록을 보면 3.3m²당 거주인구가 2.6명이나 됐다. 1960, 70년대 서울의 봉제공장들은 청계천 주변에 몰려 있었으나 수요가 늘면서 창신동에까지 들어서게 됐다. 청계천 쪽 공장들은 사라졌지만 창신동 쪽은 그대로 남아 오늘날 동대문의 배후기지가 됐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창신동의 역사를 다룬 ‘메이드 인 창신동’ 전시회를 열고 있다. 옛 사진과 자료를 전시하고 봉제공장과 ‘쪽방’도 재현해 놓았다. 어제 둘러본 전시회는 경제개발시대의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요즘 창신동 골목 풍경을 담은 사진들은 아직도 이런 곳이 남아 있는가 하는 호기심을 갖게 만든다. 과거 봉제공장에는 10대 소녀들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없다. 그 대신 50대 이상으로 머리가 희끗해진 중장년들이 일하고 있다. 청계천에서 10대 때 일을 배운 뒤 여태껏 생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다. 주문을 받으면 하루 안에 제품으로 만들어낸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