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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기차표 운동화

입력 | 2013-05-31 03:00:00


기차표 운동화
―안현미(1972∼)

원주시민회관서 은행원에게
시집가던 날 언니는
스무 해 정성스레 가꾸던 뒤란 꽃밭의
다알리아처럼 눈이 부시게 고왔지요

서울로 돈 벌러 간 엄마 대신
초등학교 입학식 날 함께 갔던 언니는
시민회관 창틀에 매달려 눈물을 떨구던
내게
가을 운동회 날 꼭 오마고 약속했지만
단풍이 흐드러지고 청군 백군 깃발이
휘날려도
끝내, 다녀가지 못하고
인편에 보내준 기차표 운동화만
먼지를 뒤집어쓴 채 토닥토닥
집으로 돌아온 가을 운동회 날

언니 따라 시집 가버린
뒤란 꽃밭엔
금방 울음을 토할 것 같은
고추들만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지요


국민동요라 할 수 있는 노래 ‘섬 아기’가 떠오른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를 집에 혼자 두고 굴 따러 다녀야 했던 엄마, 그 아기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기도 전에 돈 벌러 서울 가서 안 계시는 형국이다. 화자에게는 다행히도 곁에 언니가 있었다. 엄마 역할을 하던 그 언니가 시집가던 날, 어린 화자의 불안과 슬픔이 오죽했을까. 언니도 어린 동생이 안쓰러워 눈물을 쏟았을 테다. ‘가을 운동회 날 꼭 오마고 약속했지만’ 먼 고장으로 시집 간 언니는 끝내 오지 못하고. 화자는 내내 교문 쪽을 흘깃거리며 공을 던지고, 달리기를 했을 테다. 점심시간에 다른 친구들은 가족과 둘러앉아 맛있는 도시락을 먹었을 테지. 운동회가 끝나고 혼자 터덜터덜 집에 돌아와서 화자는 뒤란으로 간다. 그립고 그리운 언니가 꽃을 가꾸던 뒤란은 이제 고추밭이 됐다. 마치 꽃밭이 언니 따라 시집가버린 듯. 엄마하고만 사는 어린이, 아빠하고만 사는 어린이, 할머니랑 사는 어린이, 친척집에서 사는 어린이, 보육원에서 사는 어린이. 요즘 이런 어린이가 많아졌다고 한다. 이 어린이들은 대개 담담한 척한다. 슬픔은 받아줄 사람이 있을 때나 드러내는 것이기에. 외로움과 두려움뿐 아니라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제 처지에 대한 수치심이 엉겨 있는, 소위 결손가정 어린이의 슬픔. 이 슬픔을 어떻게 달래줄까…, 대책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냥 네 운명이려니, 팔자려니 할까….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