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게임 ‘메이플스토리’… 전설의 영웅 58세 권순국 씨
5월 19일 메이플스토리 10주년 기념 행사장에 참석한 권순국 씨(왼쪽)와 조카 장영재 씨(가운데), 아들 홍인 씨.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10대 청소년 두 명이 눈에 경외심을 가득 담고 양복을 입은 중년 남자에게 다가갔다. 중년 신사는 금테 안경에 청색 넥타이를 매고 머리를 뒤로 넘긴 전형적인 ‘아저씨’였다. 그가 “네, 그러세요”라며 곁에 오라고 손짓하자 막내아들뻘인 학생들의 얼굴은 감격으로 달아올랐다. 뒤에서 다른 청소년들이 수군댔다.
“저 사람이 타락파워전사야?”
‘전설의 영웅’이 된 중년 신사
지난달 19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메이플스토리 10주년 유저 초청 페스티벌’ 행사장. 이날 행사장을 찾은 방문자 6000여 명은 대개 캐주얼한 옷을 입은 10, 20대 젊은층이었기에 중년 신사는 더 눈에 띄었다. 걸그룹의 축하공연 뒤 시작한 본행사에서 공서영 아나운서가 이 신사를 무대 위로 불렀다.
“이분, 여러분이 다 아실 것 같아요. 히어로, 랭커, 파란모자, 다 아시겠죠?”
넥슨이 2003년 서비스를 시작한 메이플스토리는 국내 회원 수 1800만 명인 ‘대한민국 대표 온라인게임’이다. 귀여운 캐릭터와 쉬운 플레이 방식으로 초등학생과 여성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고, 초기 팬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이 게임을 계속 즐기고 있다. ‘고렙’(높은 레벨)이 아니면 인기가 없어 반장 선거에도 나가지 못하고, 그렇다 보니 학부모가 대신 해준다는 게임이다. 2011년 8월 동시접속자 62만여 명이라는 수치는 아직까지도 국내 온라인게임 사상 최고 기록이며, 이 게임을 기반으로 한 같은 이름의 만화책은 1000만 부가 넘게 팔렸다. 60개국에 회원이 1억 명 있다.
실시간으로 순위가 집계되는 이 게임에서 권 씨는 5년 9개월 동안 1위 자리를 지켰다. 특히 2007년 4월 메이플스토리에서 당시 최고 레벨인 200레벨에 처음으로 오르면서 게임 유저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른바 ‘만렙’(레벨을 다 채운 플레이어라는 의미)이 된 것. 메이플스토리가 올해 최고 레벨을 200에서 250으로 조정하면서 현재는 ‘만렙’이 아무도 없고, 지난달 20일 기준으로 권 씨의 레벨은 214레벨, 종합 랭킹 35위다.
온라인 세상에서 권 씨의 인기를 짐작해 보려면 검색창에 그의 ID를 쳐보면 된다. 네이버에서 ‘타락파워’라는 네 글자만 넣어도 ‘타락파워전사 나이’ ‘타락파워전사 근황’ ‘타락파워전사 얼굴’과 같은 검색어가 추천된다. 그만큼 그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행사장을 찾은 이들이 축하 메시지를 보드에 붙이고 있다(위 사진). 권순국 씨(오른쪽)가 메이플스토리 개발을 총괄하는 오한별 프로듀서와 포즈를 취했다. 넥슨 제공
“처음에는 아들이 하는 걸 옆에서 구경했죠. 인터넷이 발전하니 이렇게 멋있는 게임도 나오는구나, 화면도 예쁘고 음악도 좋네, 하면서요.”
권 씨는 2003년 메이플스토리를 처음 만났을 때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전까지 컴퓨터게임은 해본 적이 없었다. 아홉 살 초등학생이던 아들 홍인 씨가 게임 안에서 돈이 없어 아이템을 구걸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처음에는 3000원을 결제해줬고, 다음부터는 아예 같이 게임을 하며 도왔다. 아들이 만든 ‘타락파워전사’라는 캐릭터를 이듬해 아버지가 넘겨받았다. 나중에는 부인도 같이 하게 됐다. 권 씨는 “우리 또래 남자들 취미라는 게 친구들과 술 마시고 고스톱 치는 것 아니냐”며 “메이플스토리에 재미를 붙이면서 오히려 아내, 아들과 더 대화가 많아지고 살가워졌다”고 말했다.
초기에는 조작법도 서툴고 게임 안에서 어수룩하게 굴다 사기를 당하는 고충도 있었다. 해킹을 당해 아이템이 다 없어졌을 때에는 온 집안 분위기가 싸늘했다고 한다. 젊은이들에 비해 손 움직임이 느리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는 “살기 위해서는 빨라질 수밖에 없더라”라며 쑥스러워했다. 나이가 많아 유리한 면도 있었다. 자꾸 캐릭터와 직업을 바꾸며 쉽게 냉정을 잃는 어린 유저들과 달리, 한 캐릭터를 진득하게 키우고 마인드컨트롤과 협업 플레이에 능하다는 점이다. 그는 1위를 한 비결에 대해서도 “메이플스토리는 마라톤 같은 게임”이라며 “지치지 않고 꾸준히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명도를 얻으면서 그가 운영하던 피자가게를 찾아오는 팬들이 생겼다. 그 역시 홍보 전단에 ‘타락파워전사가 직접 운영하는 매장’이라는 문구를 새겼다. 요즘은 광주 북구 일곡동에서 직원 20명 규모의 퓨전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권 씨는 “많이 할 때에는 하루 20시간씩 매달린 적도 있었으나, 200레벨을 달성한 뒤로는 가끔 새로 나온 보스를 잡거나 길드(연맹) 멤버들과 친목을 다질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게임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유저들이 그에게 보내는 존경은 게임을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비롯된 건 아니다. 타락파워전사는 나이 어린 사용자들에게도 깍듯하게 존대를 하고, 플레이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방식으로 했다. 그가 다른 고수들과 함께 운영하는 ‘핌(FIM)’ 길드는 매너가 안 좋은 플레이어는 아무리 게임을 잘한다 해도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길드에서 만나 결혼하기도
“애들 게임이지만, 게임 속 세상은 현실과 똑같습디다. 유저들 간에 파벌이 생기고, 시기심에 다른 사람의 플레이를 방해하고….”
권 씨는 스토커에 시달리다 경찰에 고발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씁쓸하게 웃었다. 유명인인 그를 게임 안에서 아침저녁으로 찾아와 욕을 하는 유저를 말로 타이르고자 전화번호를 가르쳐준 게 실수였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욕설 전화를 걸던 스토커는 잡고 보니 결손가정 출신의 고등학생이었다. 사과를 받고 합의서를 써줬다. 권 씨는 “호기심이나 말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찾아와 욕을 하거나 플레이를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그래도 좋은 추억이 훨씬 더 많다”고 말했다.
“광주 지역에서는 ‘타락파워전사의 아들이 어느 학교에 다닌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아버지 덕택에 유명했다”는 아들 홍인 씨는 올해 인하대 정보통신공학부에 입학했다. 그는 거실에서 컴퓨터 3대를 놓고 아버지, 어머니와 플레이 했을 때와 아버지와 함께 사냥 중에 초고가 아이템을 얻었을 때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홍인 씨의 여자친구도 학교에서 맞춘 응원용 티셔츠 등에 ‘타락파워전사’라는 문구를 새길 정도로 권순국 씨의 팬이다.
권 씨의 조카인 장영재 씨(26·청주미평국제모터스 부장)는 핌 길드 정기모임에서 아내를 만났다. 5년간의 연애 끝에 2011년 결혼식을 올렸고, 지금은 1남 1녀를 두고 있다. 중장년 구성원이 많은 핌 길드는 1년에 두 차례씩 오프라인에서 모임을 갖는데, 매번 전국에서 50∼100명이 모인다.
10주년 기념행사를 앞두고 넥슨이 메이플스토리 홈페이지에서 벌인 사연 공모에는 5900여 건의 글이 올라왔다. 이 중에는 ‘메이플스토리를 하면서 남자친구를 만나 현재 2년째 사귀고 있다’(ID 공팔공공공)거나 ‘어머니와 게임을 같이 하고 있다’(보이스똑), 심지어 ‘교생 선생님과 함께 게임을 하고 친해졌다’(스틸림팬텀)는 사연도 있다.
‘뛰어놀 공간이 부족한 우리나라 아이들에게 넥슨이 놀이터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명감을 가져달라’(리이)와 같은 당부도 있다. 권 씨 역시 “메이플스토리가 1인 플레이를 강화하면서 과거의 화목한 분위기가 줄어들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사용자들이 이 게임을 어떻게 여기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넥슨 측은 “사용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7월에 대규모 업데이트를 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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