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39>박경리 2
어머니와 딸과 사위, 70년대 정릉 집에서 찍은 것이다. 왼쪽부터 박경리, 김영주, 김지하. 동아일보DB
대한제국 때인 1897년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 때까지 벌어진 한국 역사의 굴곡과 파장을 담은 ‘토지’의 집필 기간과 원고 장수에서 박경리 선생이 세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삶이 감당하지 못할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예술혼을 불태운 박 선생의 삶은 초인(超人)을 연상케한다.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집을 나가셨는데, 어머니는 세속적이며 생활력이 강한 여인이었지요. 그런 어머니에게서 강한 저항감과 연민의 정을 동시에 느꼈지요. 나는 자라면서 몽상가적 (아버지) 기질과 리얼리스트적 (어머니) 인식이 충돌을 일으킬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박 선생은 진주고녀를 졸업한 이듬해인 1946년 고향 통영에서 결혼한다. 주변에서 정신대에 끌려갈까 봐 서둘러 결혼을 시켰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를 온몸으로 체험한 그에게 일본은 혐오나 증오의 수준을 넘어섰다. ‘토지’ 속 많은 인물 가운데 극악한 행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모두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챙기는 일본식 행악의 모습을 닮아 있다.
작가는 토지에서 ‘오가다 지로’라는 일본인을 등장시켜 일본인으로 하여금 일본을 비판하게 한다. 생전 그의 말이다.
‘일본 어느 평론가가 나를 반일 작가라면서 자기네들에게 많은 것을 배워갔음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라고 빈정댄 일이 있습니다. 나는 일제시대에 태어나 교육을 받은 사람이지요. 그러나 진정 일본에게서 배울 것이나 가져올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서양에서 물 건너온 박래품뿐이었지요. …청년기까지 나의 삶은 뿌리가 뽑혔다는 부당한 슬픔과 강요된 일본 것으로 박제되어 있었다고나 할까…일본 문화의 본질은 죽음과 폭력이지 결코 삶과 생명이 아닙니다.’(1994년 ‘작가세계’)
박 선생은 2005년 1월 1일자 신동아 황호택 논설위원(현 논설주간)과의 인터뷰에서 남편 이야기를 한다.
“일제 때 도쿄에서 학교를 다니며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에서 형무소살이를 1년 했어요. 성질이 고지식하고 괴팍한 사람인데 단식투쟁을 해서 형사가 형무소까지 와서 취조를 했대요. 형사한테 그릇을 막 집어던졌다나요. 결혼한 후에야 일본에서 형무소살이 한 것을 알려 주더라고요. 일본인 교사의 도움으로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다고 해요. …꾀부릴 줄 몰라 (해방 후) 죽은 거죠.”
박 선생은 남편을 잃고 고향 통영으로 내려가 수예점을 하면서 생활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1954년 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한국상업은행(현 우리은행) 서울 용산지점에 근무하면서 습작을 시작하는데 이즈음 고향 친구가 세 들어 살던 집이 바로 작가 김동리 선생 집인 것이 인연이 되어 친구 소개로 김 선생을 만나게 된다. 이후 그의 추천으로 단편 ‘불안시대’가 ‘계산’이라는 제목으로 1955년 8월 ‘현대문학’에 게재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홀로 아이 둘을 키우다 문학에의 꿈을 키워가고 있던 선생에게 1956년 두 번째 불행이 닥친다. 외아들이 사고로 병원 치료 중 숨진 것이다. 작가는 참척의 고통을 글로 표현했다. 당시 일을 소재로 한 자전적 단편소설 ‘불신시대’로 1957년에 제3회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받고 이듬해 첫 장편소설 ‘애가’를 시작으로 장편에 몰입해 1959년 ‘표류도’, 1960년 ‘성녀와 마녀’, 1962년 ‘김약국의 딸들’을 잇달아 펴낸다.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촌부(村婦)가 되고 싶었다”는 그는 데뷔 직후 ‘현대문학’이 주최한 문학의 밤에서 “행복했더라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전쟁미망인이었습니다. 불행의 상징이죠. 가난하고, 애 데리고, 부모 모시고, 혼자 벌어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기에 (글을) 써온 것이죠. 불행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소망 말이죠.”
무엇보다 박 선생의 삶을 힘들게 한 것은 ‘이념’이었다. 생전에 그는 “이데올로기 문제는 6·25전쟁에서부터 지하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돼) 감옥에서 출옥할 때까지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광복 후 좌우 이념대결과 전후 사회주의자로 몰린 남편의 죽음, 그리고 70년대 사위 김지하의 민주화 투쟁을 겪으며 온몸으로 ‘이념 투쟁’과 맞닿아 살았던 작가는 94년 작가세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공산주의(요)? 솔직히 말하면 전쟁 전에 모두 그랬던 것처럼 (나도) 사회주의에 호감을 갖고 있던 편이었어요. 그런데 전쟁 통에 지상으로 나온 남로당 공산주의자들의 행동을 보고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권력욕에 사로잡혀 자리다툼을 하고 재물을 탐하는 그들에게서 이데올로기의 허망함을 보고 만 것이에요. 나에게는 가족의 생존이 더 시급했습니다. (그렇지만) 이후에도 기관원들로부터 많이 시달렸지요. 진저리가 나요. …해방 후 좌우익 싸움의 아수라장에서 나는 철저한 희생자였습니다. 투옥된 남편을 만나러 매일 서대문(구치소)을 기웃거렸고 남은 가족에게 닥칠 위험이 공포로 다가왔지요. 이것이 나를 엎드리게 만들었어요. 강요의 굴레는 박정희 시대에도 계속되었지요.”
다음은 2005년 신동아 황호택 논설위원과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다.
“딸이 김지하와 결혼할 때 정보과 형사가 정릉 집으로 신원조회를 왔더군요. 원보(손자) 외할아버지(박 선생의 남편) 얘기를 물었어요. 내가 얼마나 싫었겠어요. 이미 ‘시장과 전장’에 다 쓴 건데, 공인된 비밀인데, 왜 묻느냐고 고함을 쳤어요. 얘기하기가 싫어서…. 원보가 나중에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듣더니 아버지(김지하)와 할아버지만 그런 줄 알았는데 외할아버지도 그랬냐’고 하더군요.”
당시 맏손자 원보의 질문에 외할머니였던 박 선생의 마음이 얼마나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졌을지… 감히 짐작이 간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