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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김일성 이심전심, 미국 중국 더이상 못 믿겠다

입력 | 2013-06-05 03:00:00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41>7·4남북공동성명 2




1972년 11월 3일 2차 남북조절위원회 회의를 위해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위원장과 보좌단이 김일성 등 북한요인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부터(당시 직함) 최규하 청와대 특별보좌관, 김일 북한 내각 제1부상, 이후락 부장, 김일성 북한 내각수상, 장기영 부총리. 동아일보DB

국제 정세는 1969년 말부터 긴장 완화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선다. 첫 테이프를 끊은 것은 서독이었다. 서독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5년 동안 동서 양 진영 대립의 한 축이었던 소련과 우여곡절 끝에 ‘서독 소련 조약’을 맺는다. 향후 무력을 행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경제 기술 협력을 강화한다는 내용이었다. 서독은 곧이어 폴란드와도 상호무력행사 포기, ‘오데르 나이세’ 국경선 인정(제2차 대전 후 오데르, 나이세 두 강 동쪽의 옛 독일령을 폴란드 영토로 인정한다는 내용), 경제 협력 등을 내용으로 하는 ‘서독 폴란드 조약’을 맺는다.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1970년으로 접어들면서 동서독 유엔 동시 가입, 인적 경제적 교류 추진, 관계 정상화 추진을 위한 상설기관 설치 등을 협의하기 위해 동독에 직접 들어가 회담을 진행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김정렴 비서실장 회고록 중 일부다.

‘박 대통령은 브란트 총리의 과감한 동방정책, 특히 동독과의 협상이 장차 북한과의 관계 개선, 나아가서는 남북통일에 참고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서실더러 가급적 많은 정보를 수집해 올리라는 지시가 있어 자세한 외신과 외교논문을 수집 번역해서 올렸다.’

71년으로 접어들자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방중계획을 발표하고 중국의 유엔 가입, 미-영-소-프 4대국 사이의 베를린 문제 완전 합의, 동남아국가연합(ASEAN) 가맹 5개국의 동남아 중립화 선언 등을 추진했다. 세계정세는 냉전시대를 끝내고 해빙을 향해 크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시 김정렴의 회고다.

‘닉슨 대통령의 방중 발표에 박 대통령은 지극히 놀랐다. 6·25동란 중 압록강까지 진격해 남북통일이 이뤄질 찰나에 중국군의 참전과 인해전술로 한미 연합군은 막대한 타격을 입어 1·4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후 격전을 거듭한 끝에 현재 휴전선에서 휴전하지 않았던가.…박 대통령은 이 격동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골똘히 생각했다.’

71년만 해도 남한은 북한에 군사력은 물론이고 경제력에서 크게 밀렸다. 남한은 유신이 선포되는 72년에 가서야 북한에 광복 후 처음으로 1인당 국민소득 316달러로 엇비슷한 수준에 도달한 뒤 73, 74년을 거치면서 조금씩 앞서가기 시작한다.

서독처럼 동독을 누를 수 있는 경제 군사적 힘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 상황에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자주국방을 외치는 미국은 한국에 더이상 안보의 안전판이 아니었고 여기에 갑자기 조성된 동서 긴장 완화라는 국제 정세는 박 대통령에게 큰 고민을 안겨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내부적으로는 장기집권에 대한 피로감이 가중되면서 노동계, 기층민중, 종교계에서까지 민주화 요구가 분출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은 북한도 엇비슷했다. 바깥으로는 믿었던 중국이 미국과 대화를 시작하며 변하기 시작했고, 안으로는 김정일 후계구도를 안착시켜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결국 박 대통령은 세계적인 긴장 완화 추세를 ‘활용’하여 통치권을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절묘한 전략을 구상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7·4남북공동성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첫 단계는 중앙정보부가 중심이 되어 제안한 ‘천만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운동은 통일의 절절함을 잘 반영하면서도 정치사회적 위험성이 거의 없는 정책적 성격을 지닌다.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북한 적십자사에 이 사업을 제안하면서 남북관계는 요동치기 시작한다.

71년 9월 판문점에서 시작된 남북예비회담은 72년 2월 21일 닉슨 대통령의 방중 전까지 19차례나 있었으나 난항을 거듭한다. 박 대통령은 보다 효과적인 대화방식으로 특사 파견을 통한 고위층의 직접 대화가 필요하다고 보고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평양 방문을 추진한다. 다시 김정렴의 회고다.

‘이 부장이 5월 2일 평양에 가기로 결정되었다.…중앙정보부장이라는 직책은 국가 최고기밀을 깊게, 넓게 알고 있으며 특히 대(對)북한 공작과 대책의 최고책임자 한 사람으로 소위 간첩과 빨갱이를 잡는 책임자다. 나는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육체적 고통과 약물 투여로 완전히 사람을 세뇌시켜 유도하는 대로 행동하고 발설하는 극(劇)을 본 바 있었으므로 만일 이 부장이 이북에 억류되어 세뇌되고 악용된다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우선 들었다. 박 대통령이나 이 부장 모두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와 같은 염려를 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2000년 신동아 4월호는 미국 정보공개법에 따라 비밀이 해제된 70, 80년대 비밀문서 중 일부를 공개한다. 이 자료들은 필립 하비브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미 국무장관 앞으로 보낸 전문들인데 이 중에는 ‘김일성과 이후락의 만남’이란 제목으로 7·4남북공동성명 후인 72년 11월 3일 10시 15분부터 13시 50분까지 점심 식사를 겸해 만난 김일성과 이후락의 대화 초록이 담겨 있다. 대화 내용 중 일부다.

‘김일성은 여러 차례에 걸쳐 박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촉구했다. 이후락은 공동 협조가 잘 이행되고 조건이 성숙했을 때 추진하겠다고 답했다.…김일성은 또 오래전부터 자신이 제안해온 10만 명 수준의 상호병력 감축을 되풀이 주장하면서 절감된 군비예산은 경제와 정치 협력을 위한 공동개발에 사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박 대통령이 1980년의 통일을 제안했는데 그때가 되면 자신은 70대가 되고 박 대통령은 67세나 68세가 되므로 두 사람 모두 나이가 너무 들게 된다고 했다. 이후락은 “박 대통령의 말은 늦어도 1980년까지는 통일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응답했다.’

이런 정황을 보면 당시 남북대화에는 북한이 남한보다 더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밀문서는 또 이후락이 이 만남 직후인 11월 20일 하비브 대사를 직접 만나 “김일성은 68년 1·21청와대 습격사건에 대해 사과하고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재차 북한의 강경 분자들을 비난하고 박 대통령에게 자신의 사과를 전해줄 것을 요청했다”고도 전한다.

어떻든 72년 7월을 뜨겁게 달군 7·4남북공동성명은 중국을 믿지 못하게 된 북한, 미국을 믿지 못하게 된 남한이 대내적으로 통치 구조를 강화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는 비슷한 처지에 놓이면서 박정희, 김일성 정치 고수들이 전격 대화-대화 중단-통치권 강화로 이어지는 절묘한 전략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남북 대화를 통해 분단체제를 여는 물꼬가 되어 이후 남북 관계를 푸는 기본 원칙으로 자리 잡는다.

7·4공동성명으로 온 국민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8월 3일에는 또 하나의 경천동지할 발표가 나오니 자본주의 질서를 뒤흔든 ‘8·3 사채동결 조치’였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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