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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rative Report]아버지는 ‘역사’에 인생 걸고 딸은 ‘아버지’에 삶을 걸었다

입력 | 2013-06-06 03:00:00


신이화 씨가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1층 중앙통로에 있는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 신 씨가 들고 있는 책은 전 세계 조선통신사에 관한 자료를 모은 ‘조선통신사’(1996년) 시리즈 중 한 권이다. 현재 일본에서 디지털판으로도 제작하고 있는 이 책에는 고 신기수 선생이 수집한 자료들이 수록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05년 용산으로 이전하기 전인 1986년 ‘조선통신사전’을 개최했다. 당시 신기수 선생의 자료는 전시회의 핵심이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 가족이 넷인데 이불은 열 채가 넘었다. 아버지는 종종 밤늦은 시간에 지인들을 집에 데려왔다. 술을 한잔 더 하기 위해서였다. 아니다. 새로 구입한 ‘물건’을 보여주려 했다는 게 정확할지 모른다. 불콰한 얼굴의 손님들은 아버지가 꺼내 놓은 물건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딸은 다음 날 아침이면 손님들이 누워 있는 이불 사이를 헤집고 나와 학교에 가야 했다. 하루는 네 살 위 언니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엄마와 아빠가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우리 집이 없어질지도 몰라. 거지가 될 수도 있어.” 》



집과 바꾼 그림들… 교과서를 바꾸다

손님들이 늦잠을 잘 때 아버지는 서재에 있었다. 늘 오전 3∼4시면 일어나 무언가를 읽고 보고 기록했다.

오사카 외곽에 있는 집은 꽤 컸다. 아버지는 물건이 있다는 얘기만 들으면 어디든 달려갔다. 원하는 게 있다는 소식을 들은 날엔 은행 지점장이 집으로 왔다. 아버지는 집을 담보로 맡겼다. 지점장은 흔쾌히 돈을 빌려줬다. 1년에도 몇 차례씩 벌어지는 일이었다. 다행히 집은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지 않았다. 친구와 함께 하는 사업을 통해 아버지가 빚을 갚기도 했고 친정이 부유한 어머니가 돈을 구해오기도 했다.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아버지의 그런 지출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평생 후원자를 자처했다. 귀중한 자료를 구했을 때는 두 분이 손을 맞잡고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교토 출신의 재일교포 2세인 아버지 신기수 선생(1931∼2002)은 1970년대 초반 고서 시장에서 두루마리 그림 하나를 발견했다. 그림 속 일본인들은 동경의 눈빛으로 조선통신사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임진왜란이라는 단절을 겪은 뒤에도 한국과 일본 사이에 200년 넘게 지속된 평화의 시기를 아버지는 주목했다. 조선통신사의 역사가 한국과 재일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인식을 바꾸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1975년 초등학교에 다니던 딸이 일본인 친구들로부터 이지메(따돌림)를 당한다는 사실을 안 이후부터 그 생각은 절대적인 신념으로 바뀌었다. 이후 아버지는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그림, 병풍, 문서 등을 찾아 일본 전국을 헤맸다.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1979) 같은 영화도 제작했다. 이 영화는 일본 문부성(한국의 교육부) 지정 영화가 됐다.

아버지는 부지런히 수집한 자료를 연구하고 책을 썼다. 한국과 일본의 언론인 영화감독 교수 등을 만나 당신이 하는 일을 설명했다. 집으로 데려온 그들이 사이좋게 조선통신사 그림을 보며 감탄하는 것을 보는 게 당신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 여벌의 이불은 그런 날 필요했다. 딸이 중학교에 다닐 때 조선통신사는 일본 교과서에 실렸다. 교장 선생님은 “네 아버지가 교과서를 바꾸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했다.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겪는 차별은 네가 잘못해서가 아니다. 전쟁이라는 아픈 역사 때문이다. 그렇기에 너는 네 자신이 누구인지 늘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차별이 사라질 때까지 피하지 말고 맞서야 한다. 먹고살기 위해 귀화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재일교포가 모두 귀화하면 그 역사도 사라지는 것이다.”

그때는 몰랐다. 왜 아버지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사는지를. 왜 낡은 데다 예쁘지도 않은 것들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지를.

거부할 수 없는 역사의 수레바퀴

신기수 선생의 둘째 딸 신이화 씨(48)는 일본에서 고교를 졸업한 뒤 유학을 떠났다. 영국의 명문 런던대에서 언어학을 전공했고 영국 BBC와 일본 NHK 등의 방송사에서 프리랜서로 일했다. 일본과 연합군이 충돌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얀마와 인도 접경지역에서 벌어졌던 임팔 전투와 관련된 내용을 취재하기 위해 1995년 영국에 있던 당시 연합군 병사들을 수소문했다. 그들은 신 씨를 일본인으로 간주하고 인터뷰를 거절했다. 한국인이라며 다가갔지만 “일본군 소속의 한국인에게 고문을 당했다”며 역시 만나주지 않았다. 일본에서 차별을 받던 피해자 신 씨는 어느새 가해자가 돼 있었다. “역사는 돌고 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따로 없다”던 아버지의 얘기가 떠올랐다. 아버지의 뜻을 잇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된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신 씨는 2010년 9월 한국에 왔다. 한국어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서였다. 이듬해 3월 우연히 주한 프랑스대사관의 영상교류 담당관 다니엘 카펠리앙 씨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아버지의 영화에 큰 관심을 보인 그는 신 씨를 이끌고 이화여대에서 열리고 있는 한일영화축제를 찾았다. 놀랍게도 아버지를 잘 아는 재일교포 최양일 감독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역시 신기수 선생의 작품을 한국에도 알려야 한다며 신 씨를 격려했다.

카펠리앙 씨는 신 씨에게 일본국제교류기금 직원들도 소개해 줬다. 카펠리앙 씨와 국제교류기금 사람들 덕분에 신 씨는 한국영상자료원과도 인연을 맺게 됐다. 아버지의 영화를 처음으로 한국에서 상영하려는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듯했다. 그해 4월 영상자료원 관계자를 만나 아버지의 기일(10월 5일)을 전후로 ‘신기수와 일본 감독’이라는 주제의 영화제를 열기로 했다. 하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예산 부족 등 여러 가지 이유가 발목을 잡았다.

지난해 8월 새로운 프로그램을 제안했지만 역시 벽에 부딪혔다. 아버지가 인생을 걸고 기록해 온 재일 한국인 1세의 발자취를 한국에서는 자신들의 역사로 여기지 않는 것일까? 아버지의 업적은 아사히신문과 NHK 등 일본 주요 언론이 여러 차례 보도했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죄송했다. “해방을 겪은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영화가 한국에서 상영돼야 한다”고 하시던 어머니에게도 미안했다.

신기수 선생(왼쪽)과 그의 딸 이화 씨. 신 씨가 영국에 머물 때인 1993년 영국의 한 식당에서 찍은 사진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병상에서 바라보며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이 마음을 열고 교류를 시작했다”며 흐뭇해하던 신기수 선생은 그해 10월 눈을 감았다. 신이화 씨 제공

재일교포 신기수,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이처럼 떼쓰며 해달라고 하지 마라. 우리가 구걸할 필요가 없다. 때가 오면 한국에서 먼저 하겠다고 나설 것이다. 더는 너를 도와주지 않겠다.”

어머니 강학자 씨는 딸에게 화를 냈다. 아버지의 영화를 한국에서 상영하겠다고 한 지 2년이 넘었지만 이뤄진 게 없어서였다.

2010년 9월 한국에 왔을 때 신 씨는 서울 신촌의 한 하숙집에 기거했다. 그곳은 좁고 시끄러웠다. 일본을 다녀올 때마다 쌓이는 방대한 자료를 보관할 수 없었다. 2011년 8월 동부이촌동의 아파트를 월세로 얻었다. 책장부터 샀다. 복사기도 구입했다. 수십 차례 일본을 다녀와야 했다. 모두 돈이 드는 일이었다. 신 씨의 고정적인 수입이라고는 영국의 집에서 나오는 월세뿐이었기에 어머니와 언니는 돈을 모아 그에게 줬다. 그런 어머니 입에서 그만두라는 말이 나왔다. 올해 4월의 일이었다.

신 씨 역시 지쳐 있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 않았다. 신 씨의 노력은 마침내 대답을 얻었다. 지난달 초 한국영상자료원은 영화 ‘해방의 날까지’를 상영하기로 결정했다.

아버지는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자료도 수집했지만 재일 한국인들의 발자취도 부지런히 필름에 담았다. 구입한 자료도 모두 영상으로 남겼다. 조선시대에는 그림이 기록이었고 20세기에는 필름이 기록이었다. 아버지는 딸에게 말했다.

“재일교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일본에 있는 한국 관련 자료를 재일교포가 챙기지 않으면 누가 하겠느냐. 눈앞에 나타났을 때 구하지 않으면 사라질지 모른다. 희망의 역사도 아픔의 역사도 모두 자료로 남겨야 한다.”

그런 아버지를 어머니는 “한국과 일본의 책임을 혼자 어깨에 짊어졌던 사람”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메이지 시대 이후 어두웠던 한일 관계를 검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불행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200년 넘게 평화적으로 지속된 조선통신사를 통해 한국과 일본의 밝은 면을 이끌어내고 싶어 했다.

아버지의 어깨는 구원(舊怨)을 풀기 위해 나선 구원(救援)의 어깨였다. 거인과 같았던 아버지의 어깨 위에 오르자 딸은 비로소 아버지의 눈이 무엇을 바라봤는지 알게 됐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딸은 이제 첫발을 내디뎠다. 막중한 책임감에 가냘픈 딸의 어깨가 무겁다.

에필로그: 젊은 사람들이 많이 봤으면…

고(故) 신기수 선생은 조선통신사 관련 자료 110여 점과 민화 병풍 30여 점을 수집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20권이 넘는 저서와 5편의 기록영화를 남겼다.

영화 ‘해방의 날까지’는 신 선생이 1980년에 제작한 210분 분량의 16mm 영화다. 6년의 시간을 투자해 일본에서 살아남은 재일교포 1세들의 생생한 증언을 담았다. 영상자료원은 8월 15일과 17일 2회에 걸쳐 이 영화를 상영할 계획이다. 내년 5월에는 ‘해방의 날까지’를 비롯해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 ‘이름’ 등 더 많은 유작이 한국을 찾는다. ‘감각의 제국’으로 국내에서도 유명한 오시마 나기사의 ‘잊혀진 황군’, 야마다 요지의 ‘학교1’, 최양일의 ‘피와 뼈’ 등 선생 생전에 친분이 두터웠던 일본 감독들의 작품도 함께 상영할 계획이다.

영상자료원이 어려운 결정을 했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예산이 부족한 탓이다. 홍보용 자료 수집이나 활동비용은 아직도 신 씨 부담이 크다.

신 씨는 그래도 웃었다. 이제 시작이라고 했다. 서울이 아닌 곳에서도 아버지의 영화를 상영하고 젊은 사람들도 많이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일 관계가 어려운 시대일수록 아버지의 작품이 의미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가까운 미래에 한국과 일본에서 조선통신사 전시회를 개최하는 게 신 씨의 꿈이다.

이승건 기자 w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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