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서울 종로구 삼청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무실로 출근하던 최대석 당시 외교국방통일분과위원(가운데)이 취재진에 둘러싸여 질문을 받고 있다. 동아일보DB
갑작스러운 그의 사퇴 이유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을 때였다. 조심스레 그 이유를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만은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행여 출범하지 않은 박근혜정부의 성공에 누가 될 수 있다”며 비보도를 신신당부했다.
그와의 대화는 그렇게 3개월여 동안 묻혀 있었다. 그 사이, 기자는 그의 사퇴 이유를 둘러싼 미스터리의 편린들을 하나하나 모았다. 그가 사퇴할 수밖에 없었던 진실에 다가가지 못한 부채의식이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었기에….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골격을 만든 핵심 인사의 퇴장 치고 너무 갑작스럽지 않았던가.
“누군가가 책임져야 하고 그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 나라고 본다면 내가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겠다고 생각했다. 희생이라면 희생, 불이익이라면 불이익일 수도 있지만 그걸 내가 감내해야 한다면 감내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왜 책임져야 하나 하는 억울함이 왜 없겠나. 하지만 당선인이 숙고 끝에 한 것이기 때문에 일말의 불만도 없다. 그보다 덜한 사안이라고 해도 인수위원직을 사퇴했을 것이다. 내 개인의 명예가 훼손되더라도 안보에 관한 문제다. 나를 구명하기 위해 더 큰 문제를 야기하는 우를 범하지 않겠다.”
1. 그로부터 두 달여 전. 박근혜 후보 대선캠프의 외교통일추진단 소속 인사들이 서울 모처에 모였다. 2012년 12월 19일 저녁, 대선 개표방송을 같이 보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박근혜정부의 외교부 장관이 된 윤병세 외교통일추진단장, 통일부 장관이 된 류길재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를 비롯해 캠프 인사들 대부분이 함께했다.
박근혜정부 인사가 전한 말이다. “승리가 확실해지자 외교통일팀의 좌장 격인 최 교수가 캠프 사람들에게 조용히 당부했다. ‘이제 우리 더더욱 말을 조심하고 최대한 겸손하게 행동하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2009년경, 박근혜 의원은 최 교수에게 ‘박근혜표 대북정책’을 만들라고 얘기했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대선캠프 출신 인사의 얘기다.
“박 의원이 그 안을 듣더니 자기 생각을 말했다. ‘진보정부 10년간 교류협력으로 남북관계가 발전했는데 정권 바뀌었다고 1, 2년 사이에 이렇게 악화될 수 있습니까. 근본적 이유는 남북 간에 기본적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처럼 남북 간에도 신뢰가 필요합니다.’ 신뢰를 중심으로 한 대북정책으로 다시 만들어 달라는 게 요지였다.”
우여곡절 끝에 신뢰를 키워드로 한 대북정책의 윤곽이 점점 잡혔다. 최 교수와 학자들은 박 의원과 수차례 토론하면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기본 골격을 만들었다. 대선캠프 출신 인사들은 한결같이 그 중심에 최 교수가 있었다고 말했다. 캠프 사람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채 안 돼 그에게 시련이 닥칠 줄은….
한 가지, 불안한 요소가 꿈틀대고 있었다. 8일 연찬회에 참석했던 한 보수 인사가 주변에 “남북관계는 신뢰가 바탕이 돼야 하는데 우리가 그 신뢰를 쌓지 못한 측면이 있다는 최 교수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박근혜 대북정책의 DNA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으로 보였다”고 말한 것이다.
3. 1월 13일 오후 3시 반, 모든 게 뒤바뀌었다. 최 교수의 인수위원직 사퇴 소식이 알려진 것이다. 급히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최 교수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끊겼다. 다시 걸었을 땐 전화기가 꺼진 상태였다. 그날 내내 수십 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말만 반복됐다. 이후 몇 차례 최 교수의 집을 찾았지만 불이 꺼져 있었다.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인수위는 사퇴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학계 인사 10여 명에게 물었지만 정확한 사퇴 이유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여권 관계자나 인수위원들도 대부분 모른다는 반응이었다. 인수위 내부에도 아는 사람이 극소수일 거라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최 교수의 사퇴 며칠 뒤, 여권 고위 인사 A 씨가 2012년 12월 베이징을 방문해 북한 인사를 접촉했으며 최 교수가 이를 대통령 당선인 몰래 서울에서 지휘한 이유로 사퇴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한 언론은 아예 최 교수가 직접 베이징에 가서 대북 접촉을 시도했다고 보도했다. 이후 만나거나 통화한 많은 인사들은 ‘대통령 당선인 몰래 시도한 부적절한 대북접촉에 연루된 사퇴’에 무게를 뒀다.
그렇게 5개월이 흘렀다. 최 교수는 지금까지 공개적으로 사퇴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최근 만난 외교안보 부처 당국자의 얘기다. “아무래도 당선인에게 알리지 않고 대북 접촉한 게 드러나 사퇴한 게 맞지 않겠어요?” 전 국민의 관심이 쏠렸던 사퇴 초기 상당수가 확신하던 그대로였다. 과연 그럴까. 사람들이 무언가 잘못 알고 있다면?
4. 최 교수의 사의 표명을 들었던 김용준 전 인수위원장과 5월 말 연락이 닿았다. “무슨 수로 그걸(사퇴 이유를) 밝혀. 문제만 더 일으키는 거예요. 그 얘긴 지금 안 하는 게 피차 누굴 위해서든 좋아. 사퇴한 게 국가나 사회를 위해 국민의 입장에서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면 모르는데 인수위원 한 명 그만둔 걸 알 필요가 뭐 있어요. 일종의 스캔들 비슷한 건데.”
스캔들이라고? 정말 ‘국민은 몰라도 되는 인수위원 한 명의 사퇴’로 치부해도 괜찮은 걸까. 시곗바늘을 1월 10일로 돌린다. 이제, 퍼즐 조각을 맞춰간다.
1월 10일 저녁 최 교수는 인수위 통일분과 사람들과 삼청동의 한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식당에서 최 교수를 만난 한 대학교수의 말이다. “저녁을 먹으러 갔다가 식당에서 봤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했고 최 교수의 표정이 무척 밝았다.”
최 교수는 그날 식사를 한 뒤 삼성서울병원에 차려진 인수위원회 전문위원의 모친상 빈소를 찾는다. 여기서 그를 만난 한 인사의 얘기다. “다음 날(1월 11일) 국방부 업무보고를 받아야 하는데, 국방부가 자료를 늦게 줘서 자료를 읽을 시간이 부족하다고 하더라. 그만큼 일에 대한 의욕이 넘쳤다.” 10일 밤까지는 그가 사퇴를 결심해야 할 일이 생기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11일 국방부 업무보고가 끝나기 전인 오전 11시 40∼50분경 그는 인수위 사무실을 빠져나와 삼청동 거리를 한참 걸어 어디론가 향했다. 그가 사퇴한 뒤, 이날 삼청동 거리를 걸어가던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는 목격담이 알려지면서 국방위 업무보고 때 무슨 일이 생긴 것 아니냐는 설이 번졌다. 그날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다음 날인 12일 국정원 업무보고 때 배석했던 인사를 통해 최 교수가 국정원 관계자에게 언성을 높였음을 확인했다. 인수위원들은 업무보고 때 이명박 정부 5년간 국정원이 남북관계의 돌발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인수위원이었던 김장수 국가안보실장, 최 교수, 윤병세 장관 순으로 그런 지적이 이어졌는데도 국정원이 판에 박힌 천편일률적 답을 한다고 판단한 최 교수가 “그러면 안 된다”고 언성을 높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각에서 제기하듯 11일과 12일 사이 최 교수가 국정원과 갈등을 빚을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걸까.
▼ 여권인사 “국정원, 업무보고 직후 당선인측에 崔관련 보고” ▼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활동을 공식 마감한 2013년 2월 22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인수위 사무실 풍경. 인수위 활동이 끝날 때까지도 인수위는 최대석 전 인수위원의 사퇴 이유에 대해 침묵했다. 동아일보DB
실은 그날 정 전 장관을 만난 뒤인 오후 4시 이후 최 교수가 만난 사람이 더 있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외교안보 핵심 요직을 지낸 인사였다. 이 인사를 만나고 있던 최 교수는 갑작스레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그러곤 경직된 얼굴로 인수위 사무실로 급히 되돌아간다.
그 전화는 진영 당시 인수위원회 부위원장(현 보건복지부 장관)의 전화였다. 최 교수로부터 당시 상황을 들은 여권 관계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인수위에서 오간 최 교수와 진 전 부위원장의 대화를 재구성한다.
“당선인이 (어떤 일로) 무척 화가 나 있습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제가 책임지면 됩니까?”
“….”
그날 오후 5시 반경 최 교수는 김용준 위원장에게 사의를 표했다. 그런 뒤 인수위를 나서며 사무실에 있던 외교국방통일 분과 위원 서너 명에게 “복잡한 일이 생겼다.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즉, 최 교수는 1월 12일 오후 4시가 넘어서야 ‘어떤 일’로 인해 대통령 당선인이 진노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사퇴까지 속전속결로 진행된 것이다.
그럼 11일 국방부 업무보고 뒤 목격됐다는 눈물은 뭘까. 그는 그날 인수위를 나와 차를 이용하지 않고 삼청동 길을 한참 걸어갔다. 창덕궁 후원 인근 식당에서 통일부 김천식 차관과 점심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정을 잘 아는 정통한 소식통은 그날 날씨가 너무 추워 최 교수의 눈에 눈물이 맺혔지만 안 좋은 이유로 눈물을 흘릴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고 말했다. 즉 11일에도, 12일 오전 언성을 높인 국정원 업무보고 전에도 최 교수는 사퇴로 이어질 일을 통보받지 못한 것이다.
5. 그럼 그가 알게 된 ‘어떤 일’은 무엇인가. 미스터리의 핵심이다. 복수의 인사들로부터 최 교수가 생각하는 사퇴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최 교수와 가까운 한 인사의 말이다. “숨기지 말고 한번 얘기를 해보라 했더니 ‘여권 인사 A 씨의 북한 인사 접촉 시도와 관련이 있다’고 하더라.”
그럼 세간에 이미 알려진 ‘대북 접촉설’이 이유일까? 새로운 증언이 이어졌다. “최 교수는 A 씨의 북한 인사 접촉 시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그 일에 자신이 연루됐다는 국정원의 보고가 당선인에게 전해졌고 당선인이 화를 낸 사실이 최 교수에게 통보됐다는 것이다. 그 일이 사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관련된 것은 분명하다고 했다. 자신이 통일 분야의 팀장을 맡고 있으니 책임을 진다는 뜻에서 사표를 냈다고 했다. 최 교수는 국정원이 자신을 음해한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최 교수를 만난 다른 인사의 말이다. “최 교수는 그 접촉 시도에 전혀 관여한 적이 없고 그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1월 인수위에 들어간 뒤에야 듣게 됐다고 한다. 잘못이 없는데 하는 억울함이 들었지만 인수위에 부담이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사퇴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국정원이 자신을 불편하게 생각했을 수 있다고 보고 있었다. 다만 자신보다 국가안보가 중요하기에 안보를 다루는 국정원이 한 일에 대해 옳다 그르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2010년 7월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주최로 열린 ‘한반도 안보위기와 사회갈등’을 주제로 한 포럼에 참석한 최대석 이화여대 교수(왼쪽). 동아일보DB
A 씨는 또 이렇게 말했다. “그 일에 더해 국정원은 최 교수가 과거에도 대북 접촉 과정에서 부적절한 일이 있었다고 당선인 측에 보고했다고 한다.” 최 교수는 대북지원 비정부기구(NGO)인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공동대표를 지냈다.
이후 최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사퇴 이유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며 내용을 설명했지만 그는 “노 코멘트”라며 말을 아꼈다. 다만 그는 기자에게 NGO 활동을 할 때 부적절한 대북 접촉이 없었다는 점은 단호하게 강조한 적이 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등 NGO 활동을 하며 북한에 몇 차례 갔지만 확언하건대 단 한 차례도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한 적은 없다”고 한 것이다.
최 교수를 만난 인사들에 따르면 최 교수의 사퇴 이유는 김용준 전 위원장이 주장한 것처럼 “알 필요가 없는 일”이 아니라 ‘진실이 규명돼야 할 일’인 것이다.
이달 4일 진영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취재 내용을 전하며) 최 교수의 사퇴 이유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사실관계가 맞나.
“말하기 어렵다.”
―국정원이 당선인에게 최 교수와 관련해 보고했나.
“말하기 어렵다.”
―사실관계와 다른 부분이 있나.
“정확하지 않은 게 있는 것 같은데 거기에 대해 뭐라고 말하기 어렵다.”
―정확하지 않은 게 어떤 부분인가.
“얘기하기 어렵다. 그냥 일신상의 이유라는 것 말고는 일절 말하기 어렵다.”
진 장관은 “말할 수 없다”는 말을 되풀이하다 전화를 끊었다.
지난달 말 이뤄진 김용준 전 위원장과의 통화 내용도 비슷했다.
―최 교수가 A 씨의 대북 접촉 시도 건과 관련해 사퇴했지만 그 일과 관련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그에 대해 얘기할 입장이 아니다. 본인이 그렇게 얘기했으면 그런 거겠지.”
―국정원이 최 교수에 대해 당선인에게 보고를 했다고 하던데….
“그 문제는 얘기할 수 없다. 알지 못할뿐더러 안다 하더라도 얘기할 위치에 있지 않다.”
―만약 국정원의 잘못된 보고로 사퇴했다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사실이 그렇다 한들 그걸 신문에서 어떻게 무슨 수로 밝히겠나. 설사 그렇다 해도 문제만 더 일으키는 것이다.”
6. 하지만 여권 핵심 관계자의 말은 달랐다. 그는 취재된 최 교수의 사퇴 이유를 설명한 뒤 사실관계가 맞는지 묻자 “내가 듣고 알고 있는 것과 일치한다”고 말했다. A 씨는 “국정원 업무보고 이후인 1월 12일 오후에 국정원이 당선인 측에 무엇인가를 보고했고 최 교수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1월 12일 인수위원회 업무보고가 당선인에 대한 최초의 보고였고 그 전후엔 보고한 적 없다”고 답했다. 국정원은 “당시에는 당선인에 대한 보고채널이 확보되지 않아 당선인에게 바로 보고할 수 없었다”며 “우리의 보고로 최 교수가 사퇴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국정원이 A 씨의 대북 접촉 시도 사실을 베이징 현지에서 파악하고 있었던 건 분명하다. 정통한 외교 소식통은 이미 1월 “베이징 현지 국정원이 A 씨가 북한 인사와 접촉하려 했음을 포착했다고 했다. 최 교수는 베이징에 오지 않았다고 한다”고 말했다. 국정원은 “베이징 현지에서 그 일을 파악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답했다.
국정원의 반박대로 국정원이 당선인에게 직접 보고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국정원이 파악한 정보가 누군가에 의해 당선인 측에 보고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최 교수를 만난 한 인사는 “이명박 정부 인사들과 보수 인사들로부터 최 교수가 ‘햇볕정책론자’라는 이유로 비토가 있었다고 한다. 남북대화와 억지의 균형, 남북 간 신뢰 회복을 내세운 박근혜정부의 대북정책이 유화책이라는 선입관이 보수 측에 많았다”고 했다. 1월 8일 북한대학원대 연찬회에 참석한 보수 인사가 최 교수의 발언에 대해 “충격을 받았다”는 식으로 반응한 것이 단적인 예라는 것이다.
‘최대석 미스터리’는 서서히 잊혀지고 있다. 수개월에 걸친 취재에도 불구하고 사퇴의 진실을 100% 밝혀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새 정부 대북정책의 밑그림을 그린 한 핵심인사의 전격 사퇴는 ‘일신상의 문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작동한 결과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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