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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바꾼 순간]아동복지시설에 현악기 기부 홍의현 홍현악기 사장

입력 | 2013-06-08 03:00:00

들어봤나요? 情에 주린 아이들 꿈을 켜는 바이올린 소리를




홍의현 씨는 16세 때 학교에 다니고 싶어 바이올린을 깎기 시작했다. 이후 26년간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를 만들며 ‘현악기의 장인’이 됐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의 손은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였다. 그럼에도 그는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현악기 1200여 대를 기증했다. 홍 씨는 요즘도 전남 목포시 용해동 홍현악기 2층의 작은 작업실에서 소외계층 아동들에게 꿈을 선사하는 악기 제작에 몰두하고 있다. 목포=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2005년 12월. 전남 목포시 용해동에서 악기상을 운영하는 홍의현 씨는 눈발이 흩날리는 궂은 날씨에 길을 나섰다. 악기 수리 공구함을 들고 찾아간 곳은 상점에서 1시간 정도 차를 몰고 가야 하는 전남 신안군 압해도. 섬에 위치한 아동복지시설 ‘신안보육원’이 홍 씨의 목적지였다.

보육원 입구에 도착하자 아이들 5명이 세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발을 동동 구르고 서 있었다. “무슨 일로 밖에 나와 떨고 있니.” 아이들은 꽁꽁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바이올린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어요”라고 합창하듯 말했다.

홍 씨는 1년 전 신안보육원에 자신이 만든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 등 현악기 50대를 기부했다. 악기 구경은 고사하고 연주 소리조차 들어보지 못한 아이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때도 가슴이 뭉클했지만 추위를 참아가며 바이올린 선생님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모습은 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정에 굶주린 아이들에게 음악이 감성과 사랑을 심어주고 있구나.” 홍 씨는 울컥해 눈물을 쏟을 뻔했다.



20세, 공장 주인이 되다

홍 씨는 1971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신안군 지도읍에서 태어났다. 명절이나 돼야 쌀밥과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정도의 가정 형편이었다. 3남 2녀 중 셋째인 그는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면 산에 올라 땔감으로 쓸 장작을 주웠다. 중학교까지는 가까스로 졸업했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할 형편은 못 됐다.

1987년 가을 서울 신내동 친척집으로 올라갔다. 낮에는 돈을 벌고 밤에는 학교에 다닐 요량이었다. 그해 친척집 옆에 있던 악기공장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말이 공장이지 작은 가건물 작업장이었다. 무슨 악기를 만드는지도 모른 채 사장이 시키는 대로 나뭇조각을 붙이고 깎았다. 악기공장에서 일한 지 2년째 됐을 때 TV에서 한 여성이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봤다. 사장은 “네가 만든 바이올린”이라고 했다. 홍 씨는 그제야 자신이 만든 악기가 바이올린이라는 걸 알았다.

서울 생활은 곤궁하기 그지없었다. 공장에서 3년간 일하면서 고작 여의도 한 번 구경 갔다. 악기공장에서 일한 첫해 월급은 12만 원이었다. 많지 않은 돈이었지만 억척스럽게 모았다. 450원짜리 치약 한 개를 산 것이 한 달 지출의 전부인 적도 있다. 야근수당 5만 원을 더 받기 위해 매일 밤 작업장에 나갔다. 하루 15시간이 넘는 고된 일을 하다 보니 야간 고교 진학은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공부는 계속하고 싶었다. 그래서 1989년 검정고시를 치러 고졸 자격증을 땄다.

1990년 홍 씨가 일하던 악기공장은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일자리 잃은 것을 걱정하다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3000만 원이면 악기공장을 인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알뜰살뜰 모은 2000만 원에 은행 대출 1000만 원을 얹어 공장을 인수했다. 스무 살 나이에 공장 노동자가 사장으로 변신했다.



장인으로 거듭나기

공장 운영은 시작부터 시련이었다. 좋은 원목을 직접 구하러 다니다 원목중개상에게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1000만 원을 날렸다. 회사도 점점 어려워졌다. 절망 속에서도 마지막 남은 종잣돈 300만 원으로 질 좋은 무늬목을 구하러 다녔다. 그 몸부림은 희망으로 변했다. 어렵사리 확보한 질 좋은 무늬목으로 그는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종로 낙원악기상가로 현악기들을 팔러 가면 주인들은 스무 살 청년이 직접 만든 거라고 믿지 않았다. 그는 악기상 주인이 원하는 대로 디자인을 고치며 신뢰를 쌓아갔다. 악기상에 납품할 바이올린을 메고 뛰다가 도둑으로 오인 받아 경찰에게 체포된 적도 있었다. 홍 씨가 재료에 집착한 것은 ‘장인 정신’ 때문이다. 그는 “단단한 단풍나무 같은 무늬목은 디자인도 예쁘고 좋은 소리를 낸다”며 “좋은 악기를 만드는 첫 번째 조건이 나무”라고 설명했다.

홍 씨에게 믿음을 보이던 한 악기상 주인은 1990년 가을 한 외국인에게 그가 만든 바이올린을 팔았다. 이후 ‘홍 씨가 만든 악기는 디자인이 뛰어나고 소리도 좋다’는 입소문이 낙원악기상가에 돌았다. 악기공장이 제대로 돌아갈 때쯤 또 다른 난관을 만났다. 1991년 봄 홍 씨에게 군 입대 통지서가 나온 것이다. 시골에서 단기사병(방위병)으로 근무하게 된 그는 공장을 처분하고 악기 제작 기계와 남은 무늬목을 시골집으로 가져왔다. 낮에는 군대 생활을 하고 밤에는 시골집 창고에서 악기를 만들어 택배로 서울 낙원악기상가에 보냈다.

1993년 군 복무를 마친 뒤에도 창고에서 계속 악기를 만들었다. 홍 씨가 만든 악기는 낙원상가에서 차츰 명성이 커져갔다. 1996년 목포과학대 공예과에 입학해 늘 바라던 배움의 꿈을 이뤘다. 그러고는 1997년 목포시 용해동 39m² 크기 가게에 ‘홍현악기’를 차렸다.



마음 치유하는 음악 기부 꿈

악기 장인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던 그에게 10대의 꿈을 되살리는 작은 계기가 찾아왔다. 1998년 아동복지시설인 전남 영암군 영애원 관계자가 찾아와 “가족이 없어 외로운 아이들에게 음악으로 꿈을 심어주고 싶다. 바이올린과 첼로를 구입하고 싶다”고 했다.

홍 씨는 몇 개월 뒤 영애원을 찾았다. 배움에 굶주린 아이들 30명이 눈에 들어왔다.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사는 아이들에게 음악이라는 치유의 선물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했고, 바이올린을 깎아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늘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그는 바이올린 등 현악기 10대를 영애원에 무상으로 줬다. 첫 기부였다. 이후 전남 무안 소전원, 목포 경애·아동·성덕원, 신안 보육원과 농어촌 학교를 찾아 악기를 기부했다. 사랑은 나누는 만큼 커져갔다.

2004년엔 목포 아동원이 악기를 받지 않겠다고 거절한 적도 있다. 아동원 원장은 “고가 악기인 바이올린을 어떻게 가르치느냐. 선생님을 구할 여력도 없고 악기 소모품도 마련할 형편이 되지 않는다. 연습할 공간도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홍 씨는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며 아동원 2층에 가건물을 만들었다. 아이들에게 연주를 가르칠 강사도 직접 구하고 소모품까지 들여놓았다.

홍 씨는 1998년부터 15년간 아동복지시설과 농어촌 학교 아동들에게 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 등 1200여 대를 기부했다. 한 해 평균 100대 안팎의 기부였다. 32만 원짜리 교육용도 있지만 1000만 원짜리 연주용도 있다. 그는 어려운 아이들이 오케스트라를 꾸릴 수 있도록 악기 소모품과 강사료까지 지원하고 있다. 한 해 평균 4000만 원에서 5000만 원을 기부했지만 영수증 한 장 받아 본 적이 없다.



기부천사보다 단무지 애칭이 좋다

홍 씨는 2009년 9월 당시 김유성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전남지역본부장을 만나 한국판 엘 시스테마의 꿈을 체계화했다. 엘 시스테마는 마약 범죄 빈곤에 시달리던 베네수엘라 아이들이 총을 드는 대신 악기를 연주해 삶의 기쁨과 희망, 공동체 가치를 배워 사회 변화를 이끈 기적이다.

꿈의 오케스트라가 처음 만들어진 곳은 목포다. 2010년 빈곤아동 32명이 모여 초록우산 드림오케스트라가 첫 화합 연주를 했다. 현재 초록우산 드림오케스트라 단원은 190명에 달한다. 매주 월·목요일 목포 용호초등학교에 모여 연주 연습을 한다. 홍 씨는 “빈 공공건물이 남아돌지만 어려운 형편에 연간 1000만 원의 연주 공간 사용료를 내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용호초교에서도 사용료를 받지 않고 싶지만 학교시설을 쓰면 이용료를 내야 하는 법률 규정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그는 초록우산 드림오케스트라가 기업 후원이나 정부 지원보다 소액 기부자들의 정성이 모아져 운영되기를 바라고 있다. 소액 후원은 아동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기간·방법 제한조건이 없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에 참여한 아동들은 쾌활하고 정감 있게 변했다. 일부는 음악의 천재성이 발견돼 예비 전문 연주자의 길에 접어들었다.(후원 문의는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전남지역본부 061-753-5129)

홍 씨의 손은 상처투성이다. 26년간 현악기를 깎고 있지만 날카로운 공구에 매번 손을 벤 탓이다. 그는 현악기를 만드는 장인(匠人)이라는 호칭 이외에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마음의 장인’이라는 애칭이 붙었다. 악기 등을 많이 후원해 기부천사라고도 불린다. 오케스트라 아이들을 챙기는 ‘단무장’으로, 아버지 같은 역할을 해 ‘단무지’라는 친근한 별명도 갖고 있다. 그는 기부천사라는 애칭보다 단무지라는 별명이 더 마음에 든다.

홍 씨는 2011년 3월 전남 담양에 두 번째 초록우산 드림오케스트라를 만드는 데 산파 역할을 했다. 같은 해 9월 전남 강진에 세 번째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 지난달 전남 장성에 네 번째 오케스트라가 창단됐다. 이달에는 전남 보성에, 다음 달에는 전남 여수에 오케스트라가 만들어진다. 홍 씨는 전남 22개 시군에 빈곤·농어촌 아동들을 위한 꿈의 오케스트라를 전부 만드는 게 꿈이다.

“혼을 불어넣어 만든 악기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아름다운 음색을 자랑합니다.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사는 아이들에게 음악을 통해 맑은 웃음과 사랑을 늘 연주해주는 장인이 되고 싶습니다.” 우린 그를 ‘현악기 천사’라고 부르고 싶다.

목포=이형주 기자 peneye09@dona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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