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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워 또만나/반또 현장]“신나고 신기해? 너희도 하나 만들지 그래?”

입력 | 2013-06-08 03:00:00

영상세대의 장난감 ‘립덥 비디오’의 세계




[1] 한국기술교육대 학생들이 후반부 단체 영상을 찍기 위해 이 학교 캠퍼스 잔디광장을 달려가는 모습. [2] 조선대 신문방송학과 학생들이 만든 비디오 뒷부분 영상. [3], [4] 삼성전자 직원들이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에서 촬영 삼매경에 빠져 있다. [5] 연세대 국제캠퍼스에서 립덥 비디오 촬영에 참여한 1학년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각 대학 및 기업 제작팀 제공

2006년 12월, 제이크 로드윅이라는 청년이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미국 뉴욕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시늉을 하면서 고음부에서 눈을 부라리는 등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그런 자기 모습을 소형 카메라로 내내 촬영했다. 집에 와서 로드윅은 이 영상에 곡을 입혔다. 우울한 음악에 재미있는 표정과 뒤로 휙휙 지나가는 뉴욕 거리의 모습이 뮤직비디오처럼 그럴싸했다. 그는 영상을 인터넷에 올리고 글을 썼다.

‘이런 영상을 뭐라고 부르지? 딱히 이름이 없다면 립 더빙(lip dubbing)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다음에 만들 때에는 걸음도 박자에 맞춰서 걸어야겠다.’



이런 영상을 뭐라고 하지?

립싱크를 하며 영상을 찍고 나중에 음악을 더빙한 영상, ‘립덥(lib dub·올바른 표기는 ‘립 더브’) 비디오’의 유래에 대해 위키피디아에 나온 설명이다. 로드윅이 만든 최초의 립덥 비디오는 즉각 전 세계 젊은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누군가가 그의 영상에 ‘다른 것도 올려줘!’라고 댓글을 남겼고, 로드윅은 ‘너도 하나 만들지 그래?’라고 답글을 썼다.

이후 6년여 동안 유튜브에는 120만 건이 넘는 립덥 관련 비디오가 올라왔다. 보는 것도 재미있고 만드는 과정도 재미있다. 촬영은 스마트폰으로 하면 되고 영상 편집은 개인용 컴퓨터(PC)로 하면 되니 제작비는 거의 들지 않는다. 들인 품에 비해 결과물은 꽤 멋지다. 영상세대에게 큰 장난감이 생긴 셈이다.

유튜브에서 ‘립덥’이라는 한글 단어를 입력하면 한국인이 올린 영상물이 7000건 이상 검색된다. 특히 대학 방송국이나 동호회에서 홍보용으로 만들거나, 기업체의 신입사원 연수 과정 중에 제작한 비디오들이 많이 보인다. 제작 과정이 참여자들의 협동심을 북돋우면서 시종일관 흥겹기 때문에 구성원 단합용으로 적절하다. 최종 결과물은 ‘만든 사람들이 있는 조직은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분위기일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패러디한 ‘교회스타일’ ‘경찰스타일’ ‘성당스타일’ 등의 영상물도 립덥 비디오의 일종이다. 이 영상들은 기본 구성과 안무를 원작 뮤직비디오에서 따왔지만 꼭 그렇게 만들 필요는 없다. 대개는 앞으로 나아가는 카메라 앞에 등장인물이 차례로 나와 맡은 동작을 한 뒤 화면 밖으로 빠지는 형태로 만든다. 군무를 공들여 연습하지 않아도 뮤지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세련되고 역동적인 분위기가 연출되기 때문이다.



축제 같은 촬영장 분위기

인터넷에서 가장 유명한 립덥 비디오 중 하나는 ‘아이작의 라이브 립덥 프러포즈’라는 제목의 영상물이다. 아이작 램이라는 이름의 청년이 지난해 5월 촬영한 이 립덥 비디오는 조회수가 2000만 회가 넘고 ‘좋아요’는 18만여 건을 기록했으며, 댓글은 2만7000여 개가 달렸다.

이 영상 도입부에서 램은 여자친구를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뒷좌석에 태우고 헤드폰을 씌운다. 차량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헤드폰에서는 미국 가수 브루노 마스의 노래 ‘매리 미’(결혼해 줘)가 나온다. 차 뒤에서 램의 친구와 친척 60여 명이 순서대로 나타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나면 램이 무릎을 꿇고 여자친구에게 청혼한다. 남자친구의 깜짝 선물에 놀란 여성의 생생한 반응도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한국에서는 지난해 9월 한국기술교육대 재학생 400여 명이 만든 립덥 비디오가 화제를 모았다. 전교생의 10분의 1이 참여한 이 비디오는 학생들 요청으로 출연한 이기권 총장이 지루한 강의를 늘어놓는 동안 학생들이 뒤에서 낮잠을 자거나 화장을 고치고 잡담을 하는 등 딴짓거리를 하는 콩트로 시작한다.

이어 싸이의 노래 ‘예술이야’와 ‘연예인’에 맞춰 한국기술교육대 캠퍼스 곳곳을 카메라가 누비며 학생들이 퍼포먼스를 펼치는 장면을 담는다. 건축공학부 학생들은 안전모를 쓰고 삽질을 하고, 검도부 학생들은 볏짚을 벤다. 마지막에는 학생들이 모두 비옷을 입고 잔디광장으로 나와 춤을 춘다. 총연출을 맡은 강래윤 씨(기계공학부 3학년)는 “학교를 홍보하자며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모였다”며 “토요일에 12시간 동안 찍었는데 촬영 내내 축제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제작비는 중요하지 않아

삼성전자 5개 사업장의 임직원 111명이 2011년 7월 이 회사 서울 서초동 사옥에 모여 촬영한 영상은 완성도 면에서 가히 ‘블록버스터급’이다. 그런데 이 영상조차 제작비는 100만 원가량밖에 안 들었다. 연출을 맡은 이 회사 커뮤니케이션팀 유인학 대리는 “기업 이미지를 바꿔 볼 방안을 고민하다가 립덥 비디오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사업장별로 출연 희망자를 모았다”며 “김밥 값과 소품비 외에는 돈이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완성도의 비결은 돈보다는 3개월에 걸쳐 꼼꼼하게 동선과 아이디어를 준비하고 촬영 당일 “내가 실수했으니 다시 찍자”는 참가자들의 요구로 8시간 동안 10번 이상 재촬영을 했던 덕이라고 한다. 사내 댄스동호회 회원이 안무를 맡고 TV 동작음을 만드는 사운드 디자이너가 립덥 비디오용 노래를 작곡하는 등 ‘사내 고수’들의 도움도 있었다.

조선대 신문방송학과 학생 79명이 지난달 모여 찍은 립덥 비디오의 제작비는 15만 원이다. 기획과 연출을 맡은 주윤상 씨(22·여)는 “파티용품점에서 촬영 소품을 사는 데 10만 원, 날이 더워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데 5만 원을 썼다”고 말했다.

이보다 적은 인원으로 빠른 시간에 후다닥 찍은 립덥 비디오라도 보기에 어색하지 않다. 아시아나항공 승무원 44명이 2011년 5월에 모여 찍은 립덥 비디오는 제작회의를 2번 연 뒤 2시간 만에 촬영을 마쳤다. 아시아나항공 본사의 승무원 훈련공간에서 촬영해 배경이 비행기 내부나 라운지 바 같은 느낌이 나는 덕을 톡톡히 봤다.

경기 남양주시의 대학생 모임 ‘플래너즈’ 소속 학생 20여 명이 모여 만든 홍보용 립덥 비디오는 남양주시 호평체육문화센터에서 지난달 열린 어린이날 행사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중 틈틈이 촬영했다. 제작비는 ‘0원’이라고 한다.



아이디어와 색종이가 필요해

어떻게 하면 재미있는 립덥 비디오를 만들 수 있을까? 네이버가 지난달 연 ‘립덥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연세대 영화 소모임의 안수경 씨(여·사학과 1학년)는 “자기만의 아이디어나 필살기가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인천 연수구 송도동의 연세대 국제캠퍼스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는 안 씨의 동기들은 샤이니의 ‘아름다워’와 같은 노래를 거꾸로 틀고 그에 맞춰 영상을 촬영한 뒤 이를 역순으로 편집했다. 이들의 비디오는 꽃종이가 땅에서 하늘로 치솟고 바닥에 흩어져 있는 트럼프 카드가 손으로 날아 들어오는 ‘특수효과’가 시종일관 보는 사람의 눈을 사로잡는다. 공포영화 분위기를 연출했다가 갑자기 개그가 터지는 반전도 재미있다.

단국대에서 학부 과정 때 립덥 비디오 촬영에 스태프로 참여하고 너무 재미있어서 동국대 대학원에 들어가 이 학교 학생들과 다시 립덥 비디오를 기획해 촬영한 강중규 씨(교육대학원 영어교육전공)는 “참가자를 모으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300∼400명이 모이면 자기들끼리 신이 나서 아이디어를 내고 우스꽝스러운 동작도 하더라”는 설명이다.

지난해 GS칼텍스에 입사해 신입사원 연수 중 10시간에 걸쳐 립덥 비디오 아이디어 회의와 촬영을 마친 신병주 씨(29)는 “창피한 감정을 잊고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어색하고 떨떠름한 표정이 화면에 드러나면 분위기가 확 죽는다는 것.

마음은 있지만 몸이 따라가지 않는 ‘몸치’들은 가발, 색종이, 풍선, 목장갑, 눈송이 스프레이 같은 소도구를 활용하면 좋다. 마스크 팩이나 예비군복으로도 익살스러운 효과가 나고, 정장 상의를 보여주다 어울리지 않는 하의를 비추는 식의 연출도 어렵지 않으면서 웃음을 준다. 동선은 일직선으로 하지 않고 변화를 주는 게 좋고, 미리 리허설을 통해 배경을 확인하고 여러 사람이 모일 장소와 거기까지 가는 촬영 속도를 정해놓으라는 게 경험자들의 조언이다.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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