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좌파정책 고집하는 프랑스… ‘유럽의 환자’로 EU속 섬이 되고기 쓰고 배우자는 독일은 “쉬운 해고, 더 쉬운 고용”으로 말갈아 탄 지 이미 10년사민주의 본토조차 시장-유권자 중시로 진화하는데 한국 좌파는 어디쯤 와있나
김순덕 논설위원
“구조개혁과 건전한 재정이 건강한 경제의 근본입니다. 지금 행동을 취해야만 유럽이 위기에서 벗어나 강해질 수 있습니다.”
조제 마누엘 두랑 바호주 집행위원장의 ‘위기 극복을 위한 개별 국가에 대한 권고’ 발표가 끝나자 한 기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EU 집행위원이 독일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프랑스는 개혁할 준비가 0%라고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4분간의 긴 답변이 끝나자 다른 기자가 “프랑스 방송을 위해 지금 한 말을 프랑스어로 다시 해 달라”고 요청했다. 회견장에 웃음이 터졌다. 바호주는 “기꺼이”라며 똑같은 설교를 되풀이했다. 회견 시간의 절반을 프랑스가 잡아먹은 덕에 다른 나라는 망신살을 피했다.
‘유럽의 신(新)환자’로 찍힌 프랑스의 최근 실업률이 1996년 이래 최고치인 10.5%다. 대통령 지지율은 역대 최저치인 24%를 맴돈다. 이 나라에서 잘되는 건 아기 만들기밖에 없다는 썰렁 개그가 나돌 정도다.
EU가 국가 역할을 강조하는 사회당 정부에다 공공지출을 삭감하라는 건 사회민주주의를 포기하라는 말로 들릴 수 있다. 노동유연성, 연금축소 같은 구조개혁 권고 역시 대선공약을 뒤집으라는 소리다. 나라를 살리려면 당이 죽어야 할 판이다.
다음 날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의 파리 공동회견에서 “개혁은 우리가 할 일이지 EU가 명령할 순 없다”며 발끈했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그런데 메르켈이 옆에서 초를 쳤다는 거다.
울지도, 웃지도 못할 올랑드의 모습은 유럽의 ‘진보’가 처한 참담한 상황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프랑스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와 유로존 재정위기 이후 치러진 EU 국가 선거에서 중도좌파 정당이 단독집권한 세 나라 중 하나다(다른 두 곳은 몰타와 슬로바키아). 경제위기가 번질 때만 해도 신자유주의는 파탄 난 분위기였지만 막상 선거에선 우파 정부를 택한 사람들이 더 많다는 얘기다.
위기감에 허덕이던 유럽의 좌파 정당들과 지식인들이 4월 덴마크 코펜하겐에 모여 ‘진보 거버넌스 콘퍼런스’를 열었다. 표를 얻지 못한 이유는 ‘큰 정부, 작은 시장’의 수구좌파 경제정책을 고수해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이제는 좌파도 세계화 고령화에 맞춰 적응해야 하고, 특히 시장을 알아야 사회를 위해 이용할 수 있다는 결론은 뜻밖이고도 신선하다. 우리나라에서 늘 듣던 소리와는 아주 딴판이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영국 노동당은 지난주 “집권하면 균형재정의 철통 원리를 지키겠다”며 과거와 결별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독일도 달라진 걸 잘 모르는 모양이다. 메르켈이 말했듯 현재 독일경제의 핵심은 노동유연성이다. 꼭 10년 전 사민당 정부 때 해고를 쉽게 만들어 고용도 쉽게 할 수 있게 만든 하르츠 개혁 덕분에 지금 유럽에서 최저수준인 5.4%의 실업률을 자랑하게 된 것이다.
당명에서 진보라는 두 글자를 뺄까 말까 검토 중이라는 진보돌림자 정당들이나 민주당이 진정 나라와 국민을 생각한다면, 민주노총 설득에 나섰으면 좋겠다. 노조가 노동유연성을 수용하는 대신 경영자 측은 시간제 근로자 차별을 없애도록 중재하는 일은 새누리당보다 민주당이 더 잘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 정부가 실업수당과 전직 훈련을 철저히 시행하게끔 민주당이 앞장서 대타협을 이끌어낸다면 이보다 더한 수권능력 입증은 없을 것 같다.
진보는, 사민주의는 죽지 않았다. 더 고르게 잘살 수 있는 사회로 가자는 드림은 유러피안이든 코리안이든, 우리 심장이 뛰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문제는 1970년대 이전 완전고용이 가능했던 시대의 해법을 21세기에도 외쳐대는 좌파꼴통들이다. 하르츠 개혁을 성공시키고도 지금껏 잘했네 못했네 이념투쟁을 벌이는 통에 9월 총선을 코앞에 두고도 지지율이 30%를 밑도는 독일 사민당을 배우지는 말아야 한다. ―브뤼셀에서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