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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인균의 우울증 이기기]입원시켜 달라는 어느 중년 부인의 우울증

입력 | 2013-06-11 03:00:00


류인균 이화여대 뇌융합과학연구원장 약대 석좌교수

빈둥지증후군(empty nest syndrome)이 한참 동안 유행처럼 회자된 적이 있다. 빈둥지증후군이란 아이가 커서 집을 떠나면서 부모가 겪게 되는 슬픔, 우울증 등을 뜻한다. 애지중지 키우던, 어쩌면 삶의 목적이던 아이들이 곁을 떠난다는 것을 상상해 보면 당연히 우울감이 찾아올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일반적인 예상과는 다른 연구 결과도 있다. 2009년 캐나다의 한 대학에서 시행한 연구에 따르면 자녀가 집을 떠날 때 부모들이 잠깐 동안 조금 슬퍼하긴 해도, 지속적으로 많이 우울해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아이들이 사라지면서 긍정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고 한다. 즉 부부끼리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금실이 더 좋아지고 뭔가를 많이 배우거나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 개인적인 성장도 더 일구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중년기 노년기로 접어든 전업주부 환자들을 많이 만나면서 빈둥지증후군보다는 ‘비지 않는 둥지 증후군’이 더욱 문제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최근 개봉한 영화 ‘고령화 가족’의 배우 윤여정처럼 강인하고, 언제까지나 자녀들의 자양분이 되어 줄 수 있는 엄마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수년 전 우울감과 몸이 여기저기 아픈 증세로 입원한 중년의 주부 A 씨가 있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A 씨는 “꼭 좀 입원을 하게 해 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전업주부로서 세 남매를 키우고 이제 한시름 놓나 하는 순간, 첫째 아들과 며느리가 손주를 맡기더라는 것이었다. 두 부부만 적막하게 사는 것보다는 첫 손주를 보는 것이 기쁘기도 하였고, 자녀를 키울 때는 느끼지 못하던 손주에 대한 정을 느끼기도 해서 체력이 달리긴 해도 그럭저럭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며느리가 덜컥 둘째를 임신하더니, 직장에서 중요한 직책까지 동시에 맡는 게 아닌가.

A 씨는 며느리의 배가 점점 불러오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며느리는 직장에서 승승장구 잘나가고 자아를 실현하는 것 같아 보이는 데 비해 ‘내 인생은 뭔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A 씨는 사실 빼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친구들은 젊은 시절 외국계 회사에 들어가서 이제는 높은 임원의 위치까지 오른 이도 있다. 자신은 세 명의 자녀를 키우느라 시간을 다 보내고, 이제 취미 생활이던 사진 찍기를 좀 더 전문적으로 배우면서 뭔가 자신도 죽기 전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손주 하나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둘을 키우며 남은 인생을 보내야 한다니, 울컥하며 눈물이 나오기도 했다는 것이다. TV에서 명사 강의를 들으면,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들이 출연해서 중요한 일을 이룬 것을 얘기하는데, 수십 년간 자신이 한 일은 밥 짓기밖에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A 씨의 경우에는, 가족 간 역할 조정을 통해 문제가 잘 해결되고 약 1년간 약물치료를 한 후에 회복이 되었다.

나는 이 환자분을 치료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유학할 때, 열 일 제치고 오셔서 아이들을 돌보아 주시던 장모님께 죄송하고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환자의 며느리도 안타깝게 느껴졌다. 한국사회는 양육의 책임이 온통 여자에게만 있다는 듯 모르는 체하는 아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선진국에 비해서 부족한 공공보육과 직장 내 배려 문제도 시급한 문제로 다가왔다.

주부 우울증에 대해 한 가지 더 이야기하자면, 전업주부의 삶의 의미를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 사회 분위기 탓도 크다. A 씨의 우울증을 악화시킨 건 TV의 영향이 컸다. TV에 나오는 성공한 이들은 모두 직업을 통해 ‘자아를 실현한’ 사람들이다. 과거에는 여성에게만 양육의 책임을 지우며 모든 여성을 집안에 가둬버렸던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우리 사회가 이제 여성의 직업을 통한 자아실현을 ‘너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자녀를 위해 애쓴 전업주부들의 시간들을 그저 낭비였다고 볼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집안 돌보기의 가치를 낮게 평가한다면 이런 말도 가능할지 모른다. ‘초계 변씨가 일생 동안 한 일은, ‘고작(?)’ 아들 이순신을 키우고 전쟁 중에도 용맹하게 나라의 치욕을 씻으라고 격려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의 모친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인간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일 것이다.

류인균 이화여대 뇌융합과학연구원장 약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