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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 안하면 바보”… 임원도 직원도 줄대기

입력 | 2013-06-11 03:00:00

■ 금융지주사 ‘요지경 인사’ 들여다보니




금융지주사 ‘요지경 인사’ 들여다보니

“인사 청탁은 아마추어 골퍼가 친 공이 OB(Out of Bounds·공이 코스 밖으로 벗어남) 선상에 떨어진 상황과 같아요. 누가 자신 있게 ‘OB가 아니다’라고 고함을 먼저 지르면 OB가 아닌 게 되는 것처럼, 청탁에 의한 인사도 ‘공정했다’고 주장하면 겉으로 표가 안 납니다.”

전직 은행 임원 K 씨는 은행권의 인사청탁 관행이 조용하고 빠르게 확산돼 왔다고 말했다. 겉으로는 공정을 가장한 채 부행장부터 일반 직원까지 은행권 전반에 인사청탁이 일상처럼 굳어졌다는 얘기다. 금융위원회는 은행권의 연줄 인사가 금융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렸고, 부정부패로 이어져 국민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 “본부장부터는 대부분 청탁인사”

은행 직군(職群)은 행원, 대리, 과장, 차장, 부부장(부지점장), 부장(지점장), 본부장, 부행장의 차례로 높아진다. 인사 청탁의 강도가 위로 올라갈수록 세어진다.

보통 차장부터 인사 청탁을 하지만 드물게는 신입행원 채용 때부터 청탁이 오가기도 한다. 과거 모 은행장은 임원회의 때 “지인의 아들이 은행에 지원했는데 성적이 약간 모자란다.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느냐”고 물어 임원들을 곤란하게 했다. 이 지원자는 결국 합격했지만 업무 능력이 떨어져 아직까지 적응하지 못해 고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은행 인사 담당자들은 본부장과 부행장의 경우 대부분 청탁으로 인사가 이뤄진다고 털어놨다. 보통 부행장들은 자신이 담당하는 지역의 단체장이나 국회의원들과 친분을 쌓아뒀다가 인사 시즌을 앞두고 넌지시 청탁을 한다.

특히 금융당국 및 은행권과 밀접하게 연관된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국회의원은 로비 ‘0순위’다. 박근혜 대통령이 졸업한 서강대 출신 금융인들의 모임인 ‘서금회’ 활동을 하면서 같은 대학 출신의 정치인과 접촉하는 금융인도 적지 않다.

모 은행장은 “국회의원들이 몇몇 부행장의 다음 자리를 봐달라고 할 때가 많은데 가능한 사람과 불가능한 사람의 기준을 확실히 해두는 게 중요하다”고 귀띔했다. 은행장들은 정치인의 민원을 되도록 들어주려 하지만 자리 자체가 없어 청탁을 들어주는 게 불가능할 때는 정치인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애쓴다.

금융계에서는 국내 은행의 해외 법인장을 하다가 실적 부진으로 퇴임 조치를 받은 A 씨가 퇴임 4개월 만에 자회사 대표로 옮긴 것을 두고 대표적인 청탁인사라는 지적이 나온다.

○ 은행장에 e메일로 민원을 넣기도

일반 행원이 과장이나 차장 정도 되면 줄 서는 노하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실제 많은 직원이 은행 안에서는 ‘향후 고위 임원이 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 은행 밖에서는 ‘인사 때 민원을 넣어줄 친인척’을 찾는 데 혈안이 돼 있다.

일례로 대형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7년 전 여신심사부장으로 재직할 당시 자신에게 이른바 ‘충성맹세’를 한 직원을 최근 요직에 앉혔다. 은행 내부에선 인사고과를 완전히 무시한 인사라는 불만이 흘러나왔지만 아무도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

한 행원은 “능력보다는 민원과 줄서기가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은행 내부에 더 공고해졌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원의 한 관계자는 “정부 고위직 인사의 은행원 자녀가 평소 ‘나는 아버지에게만 잘 보이면 된다’는 말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 정도”라고 말했다.

또 다른 행원은 은행장에게 ‘해외 지사로 파견을 보내 달라’는 e메일을 직접 보낸 적도 있다. 은행장은 이 행원의 용기가 가상하다며 이 행원을 파견 대상자로 선정했다. 다른 은행에서는 해외 파견자를 선정해서 발표해놓고 하루 만에 다른 사람으로 교체한 일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룻밤 사이 로비로 다른 사람이 파견자 자리를 꿰찬 것이다.

청탁이 너무 많다 보니 민원을 넣지 않고 자기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이 손해를 보는 일도 생긴다. 시중 은행에서 대기업여신을 담당하는 A 씨는 아들이 심각한 병에 걸린 사실을 병원에서 통보받은 날에도 영업에 나설 정도로 노력했다. 하지만 인사에서는 번번이 ‘물’을 먹었다. 은행 관계자는 “정상적인 인사체계를 갖춘 회사라면 청탁을 한 사람을 배제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은행권에서는 청탁을 한 사람을 배려하는 이상한 인사가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귀띔했다.

○ 줄 서느라 업무는 뒷전

최근 우리금융 KB금융 NH농협금융 등의 차기 회장 내정자가 정해짐에 따라 금융지주와 그 계열사 직원들은 ‘줄 서기’가 화두다. 부행장급 임원들은 신임 회장 내정자에게 민원을 넣어줄 외부 인사를 찾아다니고, 부장급 이하 직원들은 내정자와 지연 및 학연으로 연결된 내부 인사에게 줄을 대느라 본업을 뒷전으로 밀어내고 있을 정도다.

은행 전반에 이런 정실인사 관행이 팽배하면 결국 금융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무능한 사람이 고위직을 맡으면 실적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게 되고, 이는 무모한 투자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 잘못된 인사가 금융회사 부실로 이어져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극단적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위기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은행이 민원에서 벗어나려면 구호로만 공정한 인사를 외치지 말고 청탁을 한 사람을 승진에서 철저히 배제하는 전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홍수용·신수정 기자 leg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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