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여성 엔지니어를 대거 채용한 LG전자 창원사업장에 여풍(女風)이 거세게 불고 있다. 세탁기사업부의 김혜정 선임연구원, 에어컨사업부 송유진 연구원, 냉장고사업부 여화영 연구원(왼쪽부터)이 자신의 손을 거쳐 탄생한 제품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LG전자 제공
그렇다 보니 정작 여성들이 가장 많이 쓰는 세탁기나 냉장고 등 대형 가전제품은 대부분 남성 엔지니어들이 만들어 왔다. 워낙 덩치가 커 다루기 힘든 데다 남성 위주의 마초적인 작업장 분위기 탓에 기꺼이 발을 들이려는 여성들이 없었던 탓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여성이 생산라인에 들어왔다 나가면 소금을 뿌렸을 정도였다.
그랬던 판이 최근 LG전자 창원사업장에서는 빠르게 바뀌고 있다. 조성진 LG전자 HA사업본부장(사장)이 ‘여성 엔지니어’ 실험을 주도했다. 그는 세탁기사업부장 시절부터 “가전제품은 여성의 섬세한 감(感)으로 만들어야 대박이 난다”고 강조하며 여성 엔지니어 채용 확대를 주문했다. 조 사장은 “여성 엔지니어들에게 일을 시켜보면 결과물이 다르다. 특유의 센스에다 남성들에게 지지 않으려는 독한 정신으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낸다”고 말했다.
11일 LG전자 창원사업장에서 김혜정 선임연구원(32)과 여화영 연구원(28), 송유진 연구원(29)을 만났다. 각각 세탁기, 냉장고, 에어컨사업부를 대표하는 ‘1세대 여성 엔지니어’인 이들은 스스로 ‘무성(無性)의 존재’라 자처하며 막노동판 못지않게 몸 쓰는 일을 하고 있었다.
냉장고는 강화유리나 메탈을 소재로 하다 보니 문짝 하나만 해도 무게가 수십 kg에 이른다. 에어컨도 실외기가 워낙 무거워 장정 셋이 힘을 합쳐야 겨우 들 수 있다. 보통 제품을 출시하기 전에 수백 대를 놓고 실험하는데, 이를 밀차에 실어 실험실로 옮기고 들어 날라 조립하는 일 모두 이들의 몫이다.
송 연구원은 “우리 사업장에는 남녀 차별이 없다. 대신 여자라고 봐주는 일도 결코 없다”고 말했다. 그는 혼자 에어컨 수백 대를 운반한 적도 있다고 했다. 키 150cm의 작은 체구인 여 연구원은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냉장고를 만들기 위해 하루 종일 사다리 위에 올라서서 일한다. 그는 “전자기판이 냉장고 상단에 설치되는 모델이 많다 보니 사다리에서 일하다 떨어지는 일도 다반사”라며 웃었다.
여성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강점도 있다. 엔지니어는 하루에도 몇 번씩 생산라인을 찾아다녀야 하는데 생산직의 절대 다수인 40대 아주머니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데는 여성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김 선임연구원은 때로는 딸 같은, 때로는 조카 같은 역할을 도맡아 하며 세탁기의 생산 효율성을 크게 끌어올렸다는 평을 듣는다. 여성 소비자의 의견을 급하게 들어야 할 때는 라인으로 달려가 생산직 아주머니들의 수다를 엿듣기도 한다.
회사는 여성 연구원이 갑자기 늘어나자 이들의 업무환경을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다. 사업부마다 수유실을 신설했고 여성 엔지니어들이 쉴 수 있는 휴게실을 리모델링했다. 에어컨사업부는 정기적으로 여사원 간담회를 열어 여성 엔지니어들이 일하는 데 불편한 점은 없는지, 더 개선할 여지는 없는지 듣는다.
창원=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