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46>시민회관 화재
왼쪽부터 작곡가 박춘석, 가수 남진과 나훈아, 작사가 정두수 씨. 한 방송에 출연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동아일보DB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지는 순간, 갑자기 ‘펑’ 소리가 나면서 무대 뒤쪽이 불길에 휩싸였다. 국내 최대 공연 현장이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조명장치 과열에 따른 배선 누전이 원인이었다. 이날 불은 순식간에 지하 1층, 지상 4층 중 소강당을 제외한 3000여 평을 모두 태운 뒤 2시간여 만에 진화됐다. 빠져나오려는 관객들이 계단으로 한꺼번에 몰려드는 바람에 어린이와 여자들이 깔려 피해가 컸다. 총 52명이 죽고 76명이 다쳤다. 대피 안내판조차 제대로 없었던 전형적인 인재(人災)였다. 이날 화재로 시민회관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78년 세종문화회관으로 재개관한다.
이 대목에서 그동안 무거웠던(?) 이야기를 잠시 쉬고 72년을 마치고 73년으로 가는 길목에서 72년 한국 대중문화를 뜨겁게 달군 남진과 나훈아의 대결을 짚고 가자. 한 시대를 풍미한 대중가요에는 당시 서민들의 애환이 녹아 있기 때문에 이 역시 당시 시대상을 보는 데 의미 있으리라 여겨진다.
‘울려고 내가 왔나’ ‘가슴 아프게’로 톱스타 자리에 오른 남진이 월남에 파병된 공백 기간 동안 나훈아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 ‘임 그리워’ 등으로 정상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남진이 귀국하면서 두 사람은 정상의 자리를 놓고 피할 수 없는 맞대결을 펼쳤다. 우리 가요사에 영원히 남을 명승부인 두 사람의 대결은 시민회관을 무대로 펼쳐졌다.
71년 3월 5일 남진은 사흘간 ‘귀국 리사이틀’을 여는데 총 4만 명이 몰려 시민회관 개관 이래 최다 관객 동원을 기록한다. 이에 질세라 나훈아도 이듬해인 72년 설날부터 6일간 ‘나훈아의 꿈’이라는 리사이틀을 시민회관에서 하는데 본래 예정된 4회 공연을 5회로 늘렸는데도 매회 초만원을 이뤘다. 나훈아는 개관 이래 1일 최다 관객인 1만3000명을 동원해 남진이 세웠던 기록을 단숨에 갈아 치운다.
미디어는 ‘피 튀기는 경쟁’을 벌이던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공식석상에서 서로 외면하는 모습이 그대로 TV에 노출되기도 했다. 72년 1월 30일자 주간중앙은 ‘연예계 소문난 쓴짝 단짝-’72 더 잘해봅시다-남진 나훈아 방담(放談)’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싣고 있다. ‘퍽 서먹서먹한 대담이었다’는 기자의 멘트로 시작되는 기사 중 일부는 이렇다.
羅(나훈아, 이하 羅): 제가 비교적 사교성이 없는 것은 사실이죠. 누구를 만나든 ‘안녕하십니까’ 외에 필요 없는 말은 안 해요. 어느새 저도 후배들이 많이 생겼지만 대뜸 ‘야, 자’하지 않습니다.
南: 하지만 가요계란 어느 세계보다 선후배를 따지는 곳 아냐?
羅: 제가 인사성이 없다고 지적하시는 것 같은데 남 선배가 인사를 몇 번 안 받는 것 같기에 그렇다면 나도 더이상 인사할 필요 없겠다고 생각했죠. 그런 마음먹은 지 두 달 되었습니다.
南: 그랬었군.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인 뒤) 앞으로는 부드럽게 지내세.
두 사람의 인기대결에 음반사와 방송사는 물론 팬들도 2등분됐다.
90년대 이후 대중가요 스타들은 10대와 20대 초반 젊은이들이 주요 팬이지만 당시 남진과 나훈아 팬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학생 지식인들 농부 상인 모두가 설전을 벌일 만큼 전 계층 전 세대를 아울렀다.
두 사람은 모든 것이 대조적이어서 라이벌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조건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대중문화평론가 임진모가 문화웹진 채널예스에 쓴 내용이다.
‘부잣집 도련님 같은 외모의 남진은 얼짱 꽃미남이었고 나훈아는 ‘소도둑’ 별명에 걸맞게 남성적 서민적 풍모여서 믿음직한 느낌을 주었다. …남진은 대체로 젊은 여성팬이, 나훈아는 어른과 남성들이 좋아했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당시 새 정치를 표방한 야권의 젊은 기수이자 정치적 맞수인 김대중(목포) 김영삼(부산)과 고향이 같았다. …남진이 ‘젊은 초원’ ‘목화 아가씨’ ‘그대여 변치마오’ ‘나에게 애인이 있다면’ 그리고 결정타인 ‘님과 함께’처럼 도시풍의 신나는 노래를 불렀다면 나훈아는 ‘물레방아 도는데’ ‘고향역’ ‘머나먼 고향’ ‘녹슬은 기찻길’ 등 향수를 자극하는 애절한 노래가 많았다. 무대 의상도 남진은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시킬 정도로 화려했다면 나훈아는 수수한 차림으로 무대에 올랐다.’
국민들이 두 사람에게 열광했던 이유는 두 사람이 부른 노래들이 가난해도 노력하면 잘살 수 있다는 꿈과 이 꿈을 위해 고향 땅을 버리고 도시로 몰려든 대중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기 때문이다. 남진이 경제성장에 대한 희망을 노래했다면 나훈아는 이농(離農)의 아픔을 대변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백년 살고 싶어’(님과 함께)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번 보고/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보며 서울로 떠나간 사람’(물레방아 도는데)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72년이 가고 새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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