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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기자의 무비홀릭]나쁜 영화 착하게 보기

입력 | 2013-06-13 03:00:00


세상만사는 마음먹기 나름이다. 일찍이 심수봉도 ‘백만송이 장미’란 노래에서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급기야 백만 송이 꽃이 피어난다고 읊었지 않은가 말이다.

자, 지금부터 최근 내가 본 최악의 영화 두 편을 공개한다. 마음먹기에 따라 이 ‘나쁜’ 영화들을 ‘착하게’ 볼 수도 있겠구나!

‘애프터 어스’

애프터 어스

3072년, 낯선 행성에 불시착한 전사 사이퍼(윌 스미스)와 아들 키타이(제이든 스미스)는 이곳이 1000년 전 대재앙 이후 인류가 떠나고 황폐해진 ‘지구’란 사실을 알게 된다. 버려진 지구를 정복한 생명체들은 예측 불가능한 모습으로 진화해 그들을 공격하는데….

아, 여기까지만 들으면 기가 막힌 공상과학영화인 것만 같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면 ‘낚였다’는 배신감에 스크린을 찢어버리고 싶은 분노가 용솟음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윌 스미스가 아니다. 그는 지구에 불시착하는 순간 두 다리가 부러져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냥 우주선 안에 앉아 조잘조잘 대사만 던져댄다.

진짜 주인공은 윌 스미스의 실제 아들인 제이든 스미스(15). 제이든이 아빠의 ‘원격조종’을 받으면서 괴물을 물리치고 영웅이 된다는 성장담이다.

알고 보면 이 영화는 윌 스미스가 아들을 주연배우로 키우기 위해 함께 출연해준 작품에 가깝다. 방송인 김구라가 아들 동현이(15) 키워주는 건 윌 스미스의 노골성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가깝다. 이 영화가 처음 기획된 것도 생일을 맞은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에게 윌 스미스가 전화를 걸어 “내가 생각해둔 좋은 이야기가 있는데 말이야…” 하고 운을 떼면서부터였다는 사실. 애당초 ‘우리 아들 좀 키워보자’라는 사심 가득한 영화인 것이다!

‘윌 스미스가 나오는 액션영화’쯤을 상상하고 극장을 찾은 나는 외려 ‘윌 스미스에 대한 저주카페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극장을 나왔다. ‘아들 위하려다 아빠까지 망가진’ 대표적인 사례가 아닌가 말이다. 바로 이 순간, 아들 때린 술집 종업원을 보복폭행하다 자신까지 망가진 대기업 회장님의 모습이 윌 스미스에 겹쳐지는 것은 왜일까.

하지만 자비와 열린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는 윌 스미스를 180도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장기 경기침체를 겪는 미국에서 아들에게 소중한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청년실업을 해소하고 세계경제 회복에 일조하려는, 월드스타로서의 고육책은 아니었을까.

‘백악관 최후의 날’

백악관 최후의 날

북한 핵실험으로 세계적 긴장상황이 초래되자 미국 대통령은 한국 총리를 백악관에서 만나 의견을 나눈다. 이때 한국 측 경호요원으로 신분을 위장해 백악관에 들어간 북한 출신 ‘강’(릭윤)을 중심으로 한 테러리스트들이 백악관을 초토화시키고 대통령을 인질로 붙잡는다….

일단 줄거리부터 말이 안 된다. 말 안 되는 거 말 되게 만드는 게 ‘꿈의 공장’ 할리우드라지만, 북한 출신 테러리스트가 한국 총리의 경호원이 된다니! 백악관을 다 때려 부수고 미국 대통령을 인질로 삼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말이다. 게다가 ‘북한 출신 테러리스트들’로 설정된 동양 배우들의 한국어 더빙은 어찌나 서투른지. 북한 말씨가 아닌 ‘시크’한 서울말을 쓰는 건 접어두더라도 공포에 떠는 인질들을 향해 “조요해(조용해)!”라고 소리치는 순간에는 공포감은커녕 실소가 터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만 보더라도 북한이 지구촌에 얼마나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지를 실감나게 확인할 수 있다. 미소 냉전이 끝난 뒤 소련이나 KGB를 대신할 ‘악당’을 찾아 헤매던 할리우드는 2000년대까지 ‘아랍계 테러리스트’들을 주적으로 삼아 재미를 보더니, 최근엔 ‘북한 테러리스트’들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도 날리면서 “미국 본토도 결코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으며 월드스타(?)로 부상하지 않았던들 할리우드의 이런 상상력이 태어날 수나 있었을까.

게다가 할리우드에서 변변한 엑스트라 자리 하나 얻지 못해 배를 곯는 수많은 동양계 무명배우들이 북한 덕분에 비정규직 일자리라도 얻게 되었으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말이다. 당장 이 영화에서 북한 출신 테러리스트 두목 역할을 한 한국계 배우 릭윤(42)은 이미 ‘007 어나더데이’(2002년)에서도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북한군 악당 ‘자오’로 출연해 주인공 제임스 본드와 건곤일척의 혈투를 벌인 바 있다.

아! 드디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북한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글로벌 시장에서 아시아계 인력의 일자리 창출에 일조하게 되었구나!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