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오후 전남 목포시 행남식품 공장 제품창고에 모인 행남식품 임직원들이 자체 브랜드 ‘참 맛 좋은 김’을 들어 보이고 있다. 행남식품 공장에서 생산된 대부분의 제품은 풀무원 상표를 달고 나오지만 6∼7%는 자체 브랜드로 생산한다. 수량이 워낙 적어 소매점에선 찾아보기 어렵지만 행남식품의 자랑거리 중 하나다. 목포=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행남식품 1대 공장장인 김승렬 이사(왼쪽)와 2대 공장장인 김효길 식품사업부장은 행남식품에 오기 전에는 기계와 설비를 다루던 기계 전문가였다. 식품공장에서 10여 년을 근무한 지금은 스스로를 ‘김 전문가’라고 부른다. 11일 행남식품 공장에서 두 사람이 구이 공정을 마친 전장김의 품질을 확인하고 있다. 목포=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2002년 9월 석현공장 선별반에서 일하던 황옥선 씨(55·여)는 라인 언니들을 따라 성형반 현장으로 향했다. 노동조합 사람들이 공장 직원들을 불러 모았기 때문이다. 어려운 얘기들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 두 마디, “명예퇴직을 받습니다”라는 말을 빼고는.
행남자기의 본차이나 제품 생산라인이 여주공장으로 완전히 옮겨 가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설비가 좋아져 필요 인원이 400여 명에서 240여 명으로 줄었고, 160여 명은 일터를 떠나야 한다고 했다. 구내식당에는 ‘명퇴 희망자’를 받는 공고가 붙었다. 힘든 시절이었다. 누군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내가 뭘 잘못했느냐”며 하소연했고, 누군가는 전날 마신 술이 덜 깨 허공에 소리를 쳤다.
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 아직 취업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는 젊은 직원들은 공장을 떠났다. 몇 차례에 걸친 퇴직 절차가 이어진 끝에 60여 명만 남았다. 목포를 떠나 여주로 옮겨갈 수도, 새로운 직장을 찾을 수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서정순 씨(56·여)도 그중 한 명이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는 자식들을 두고 여주로 갈 수는 없고, 회사를 나가자니 당장 먹고사는 게 막막했다. 다른 이들도 사정이 비슷했다. 서 씨는 “항상 불안했고 자꾸만 눈물이 났다”고 회고했다. 다들 “남은 인원들의 고용은 반드시 보장해 주겠다”는 김용주 행남자기 회장의 말만 믿고 있었다.
“그때 기분이야 죽은 거나 진배없었지. 애들이 셋인디….”
김 이사는 매일 겨울바람을 맞으며 약 3km 길이의 하굿둑을 뛰었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뿔뿔이 떠나갔는데 혼자 살아남았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회사에서 명퇴를 은근히 바라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버텨야 한다, 버텨야 한다.’ 속으로 되뇔 뿐이었다.
낭보: 김 공장 만든다고?
이듬해 초 본사에서 새 소식이 전해졌다. 김 회장이 목포에 김 공장을 만들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었다. 생산한 김은 풀무원에 납품한다고 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갈 곳 없는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
김 회장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는 김준형 행남자기 명예회장의 4남 2녀 중 장남이다. 김 명예회장은 노조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1960년대 회사에 노조를 설립하기 위해 목포 지역에서 유명한 강성 노조의 위원장을 직접 불러 직원들에게 노조 관련 교육을 시킨 인물이다. 김 회장은 평소 알고 지내던 남승우 풀무원 대표와의 식사 자리에서 60명 직원의 이야기를 꺼냈고 목포 특산품인 김을 생산해 납품하기로 합의했다.
김 공장이라, 직원들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어쨌든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된 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황옥선 씨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목포에는 엄마들이 일할 수 있는 공장이 많이 없어. 당시 회장님이 김 공장을 안 지었으면 결국 우리는 죄다 그만뒀어야 할 거인디.”
행복: 4년만에 흑자로
2003년 6월 1322m²(약 400평) 규모의 공장이 준공됐다. 한 달 뒤 풀무원 공장평가팀의 시설 평가에서 합격했고 곧바로 김 제품 생산에 돌입했다. 김 재배지에서 원초(젖은 김을 말려 만든 가공하지 않은 상태의 김)를 받아 맛김으로 만드는 2개 라인에 직원들이 모두 투입됐다.
당연히 쉽지 않았다. 도기 공장과 식품 공장은 달랐다. 낯선 공정에 작업 능률은 오르지 않았다. 작업이 서툴다 보니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라는 지시가 이어졌다. 직원들은 불안해했다. 공조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김을 구울 때 나는 연기에 눈물을 흘리는 날도 많았다. 김학순 현장조장(57·여)은 “처음 식품 공장 일을 하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청소를 하고 설비를 닦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실적이 더 문제였다. 설립한 지 2년이 지나도록 적자 행진이 계속됐다. 매달 3000만∼4000만 원씩 적자가 났다. 김 이사는 매주 월요일 경영진 회의에 들어갈 때마다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적자가 3년째 이어지자 일부 경영진 사이에서 “공장을 없애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같은 일을 다시 겪을 순 없었다. 공장을 살려야 했다. 다시 일거리를 준 회사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위기 극복은 공교롭게도 도자기 공장 시절의 노하우에서 시작됐다. 도자기를 만들 때는 약간의 불순물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 꼼꼼함이 김에 딸려오는 밧줄 조각이나 새우 등 이물질을 걸러내는 기술로 이어진 것이다. 김에는 문외한이었던 김 이사와 김 부장도 원초 생산지를 찾아다니며 김 종류를 구별하는 법, 품질 관리 방법을 익혔다.
품질은 빠른 속도로 좋아졌다. 풀무원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무던히 애썼다. 물량을 제때 맞추기 위해 직원들은 자진해서 밤 12시까지 야근을 했다. 누락된 한 상자를 배달하려고 택시를 불러 인천으로 보내기도 했다.
풀무원에 김을 납품하던 4개 업체 중 가장 후발 주자였던 행남식품은 곧 우수 납품업체가 됐다. 다른 업체들이 문을 닫는 와중에도 매출은 계속 늘어났다. 2006년 추석을 전후해서는 갑자기 늘어난 주문량을 맞추려고 야외에 천막을 쳐놓고 전 직원이 매달려 밤새도록 제품을 포장하기도 했다.
행남식품은 설립 4년 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15억 원을 투자해 만든 행남식품의 지난해 연매출은 74억 원이다. 행남자기의 국내 매출 전체의 약 15%에 이른다.
행남자기가 이뤄낸 이 ‘얼떨결에 창조경제’는 직원들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결과다. 창업 당시 ‘함께 잘살아보자’는 뜻으로 지은 사훈 ‘협심동력(協心同力)’의 전통을 지켜온 결과이기도 하다.
10년: 가족처럼 뭉쳤다
11일 오전 행남식품 공장의 반제품실에서는 풀무원에 납품할 김밥용김, 전장김, 도시락김의 2차 가공작업이 한창이었다. 6개 라인에 삼삼오오 모여 앉은 직원들은 묵묵히 자기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침이 튈까 모두 마스크를 썼다. 직원들의 눈빛이 왠지 들떠 보였다. 지금은 포장팀에서 일하는 서 씨는 “불황에 주춤했던 매출이 최근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행남식품 직원들은 여전히 똘똘 뭉쳐 가족처럼 지낸다. 2003년 당시 멤버의 절반 정도는 이미 퇴직했다. 하지만 회식할 때 팀별이 아니라 전 직원이 함께하는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김 이사는 회사에서 준 20주년 근속 감사패보다 본사로 가면서 공장을 떠날 때 직원들이 준 조그만 감사패를 더 잘 보이는 곳에 두고 있다. 처음 공장에 갔을 때 여자뿐인 식당이 어색해 밥을 먹으면서 고개도 들지 못했던 그였다. 이제는 직원들을 만나면 표정이나 헤어스타일 등에 대해서도 한마디 건넬 정도가 됐다.
김 부장은 이달 25일 김 이사를 초대해 직원들과 공장에서 조촐한 다과회를 열 계획이다. 13일로 꼭 10년을 맞은 김 공장 준공일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이제 직원들은 컨베이어벨트 맞은편 자리가 아니라 아예 다른 공정으로 옮기라는 지시도 기꺼이 따른다. 더이상 자기 자리에 민감한 직원은 없다. 이들에게 2003년은 이미 추억이 됐다.
목포=권기범 기자 kak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