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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탱크까지 만드는데 우리는 소총도 못 만들었다

입력 | 2013-06-14 03:00:00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47>중화학공업




1971년 8월 28일 태릉사격장에서 열린 사격대회에 참가한 박정희 대통령. 모두 10발을 쏘았는데 첫 발은 과녁에 달린 풍선줄을 끊었고 나머지 9발은 모두 과녁 흑점을 꿰뚫었다고 한다. 동아일보DB

1973년이 밝자마자 1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전 국무위원과 여당요인들을 배석시킨 가운데 장장 2시간 17분 동안 계속된 이 발표는 마치 통화개혁이나 긴급조치 발표를 할 때처럼 긴장감이 감돌았다. 박 대통령은 이날 담화에서 ‘10월 유신’이란 말을 43번, ‘유신 과업’이란 말을 9번이나 썼다.

이날 발표는 훗날 ‘1·12 중화학공업화 선언’으로 불리게 되는 역사적 발표로 기록된다. 박 대통령은 “1980년대 초까지 수출 100억 달러와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를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겠다”며 이렇게 선언했다. “정부는 이제부터 ‘중화학공업 육성’ 시책에 중점을 두는 ‘중화학공업정책’을 선언하는 바입니다.…80년대 초에 우리가 100억 불의 수출 목표를 달성하려면 전체 수출 상품 중에서 중화학 제품이 50%를 훨씬 더 넘게 차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철강·비철금속·조선·전자·기계·화학 등 6개 중화학공업이 선정됐고, 업종별로 특화된 공단들이 전국에 지정됐다. 창원기계공업단지의 경우는 아예 방위산업 건설 추진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방위산업체로 지정되면 평상시 작업량의 80%는 민수용, 나머지 20%는 방산용의 비율을 원칙으로 삼았다. 조선소도 물론 전쟁 때 쓰일 것을 전제로 독(dock)을 건설했다.

담화 준비과정도 대통령 특명사항으로 김정렴 비서실장, 오원철 경제 제2수석을 중심으로 철저한 보안 속에 이뤄졌다. 당시 재무부 장관이었던 고 남덕우 장관도 뒤늦게야 알았다. 그의 회고록 ‘경제개발의 길목에서’의 일부다.

‘유감스럽게도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자금조달 방안에 대해서는 관계부처와의 협의가 전혀 없었다. 대통령이 계획을 재가하면 재무부는 어쩔 수 없이 대책을 마련하겠지 생각했던 모양이다. 재무부는 언제나 ‘노(No)’부터 말하는 부처니까 입안 단계에 참여시키면 될 일도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남 장관은 이후 중화학공업계획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박 대통령에게 “막대한 자금을 어떻게 조달하느냐가 문제입니다” 했다가 대통령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다시 회고록을 인용한다.

‘박 대통령이 집무실로 불러 나를 타이르듯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나라와 민족의 명운을 걸고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하다가 패망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서 지금은 세계 경제 강국으로 부상했는데 그 배후에는 중화학공업건설이 있다. 나는 지금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거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 경제의 명운을 걸고 건설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어 “장관!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 일을 해봅시다” 했다. 나는 “알겠습니다” 대답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청와대를 나왔다.’

박 대통령은 중화학공업 추진은 아예 경제기획원 손을 떠나게 하고 청와대 안에다 ‘중화학공업추진단’이라는 사령탑을 따로 설치해 전담수석비서관이 추진토록 했다.

박 대통령의 중화학공업 육성은 1973년 1월 선언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이전에는 울산공업단지 건설을 비롯해 비료공장, 포항제철소 건설 같은 사업들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70년에 들어오면서부터는 단순히 경제정책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무기 공장을 만드는 방위산업 또는 군수산업 육성책이었다. 북한의 도발은 갈수록 심해지고, 미국이 빠른 속도로 한국의 방위 부담을 줄여가는 상황 속에서 박 대통령은 ‘홀로 서기’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남한 스스로 자체적인 무기생산에 나서야겠다는 생각에 골몰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군 기본 화기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이 쓰던 M-1소총이었다. 북한은 이미 1960년대에 자동소총은 물론이고 탱크 대포까지 만들고 있었는데 말이다.

미국은 남한의 군사력이 강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우리는 미국에서 무기를 사오든지 무상으로 받아오든지 둘 중 하나였다. 그러다 68년 1·21 청와대 기습사건이 터지자 박 대통령은 미국 측으로부터 M-16자동 소총 생산 공장을 한국에 세워준다는 약속을 어렵사리 받아낸다. 하지만 난항을 거듭하며 지지부진했다. 공장은 미국과 3년여를 실랑이한 끝에 1972년에야 완공했다. 김정렴 비서실장은 회고록에서 “당시 교섭을 지켜보면서 무기 공장 건설에 얼마나 돈이 많이 들고 교섭에 장시간이 걸리며 또 교섭 자체가 힘들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말한다.

닉슨 독트린에 따른 주한미군 철수가 본격화된 70년 7월 박 대통령은 김학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게 비밀리에 병기 생산 공장 건립을 지시한다. 대통령의 특명을 받은 김 부총리는 밤잠을 설쳤다. 전문 지식도 없고 전문가의 도움도 받을 수 없던 상황에서 독학으로 파고들었다. 당시 장관 비서실장이던 엄일영 씨의 회고(책 ‘코리언 미러클’)다.

‘독서광인 김 부총리는 거의 매일 밤잠을 줄여가며 중화학 및 기계공업 관련 책을 탐독하면서 정책수립에 골몰했다. 옆에서 자는 부인이 깰까봐 라이트가 달린 펜을 구해 책을 읽고 끊임없이 메모하고 그 메모는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고 늘 자신이 가지고 다녔다. 당시 그의 집무실에는 중화학공업 육성에 따른 산업연관 흐름표가 한가득 펼쳐져 있었다.’

70년 8월에는 3군에 흩어져 있던 군사과학연구기관들이 통폐합돼 무기개발을 전문적으로 연구할 국방과학연구소(ADD)가 만들어진다. ‘번개사업’으로 이름 붙여진 연구소의 무기 국산화 프로젝트에는 이경서 구상회 홍재학 박사 외에도 군 출신 공학박사와 민간 과학자가 많이 참여했다.

구상회 박사는 2006년 12월호 신동아 인터뷰에서 1970년 초 우리나라 무기 생산기술이 얼마나 뒤떨어져 있었는지를 이렇게 증언한다.

“기계공업이란 게 아예 없었어요. 농기계를 겨우 생산하는 수준이었지요. 공업이라고 해봐야 가내공업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차량정비용 공구조차 못 만들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미국 지원으로 경남 양산에 짓고 있던 M-16소총 공장도 언제 완공될지 미지수였습니다. 박 대통령은 포병 출신이라 로켓포, 유도탄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어요. 하지만 유도탄은 노하우와 시설과 인원이 다 갖춰져 있어도 만드는 데 7년 이상 걸립니다. 그때 우리나라엔 로켓을 연구하는 곳이 공군사관학교와 KIST 두 곳이 있었는데 ‘로켓포를 국산화하라’는 대통령 지시를 따르고 싶어도 연구원 중에 경험자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교과서에서만 봤지 만든 적이 없었으니까요. 도면과 기술 자료도 전혀 없었고. 로켓포 도면을 구할 길이 없어 육군 수경사(현 수도방위사령부)에서 M20 A1, M20 B1포를 1문씩 빌려와 분해해 부품을 스케치하고 치수를 정밀 측정해 작성했어요. 역(逆)설계를 한 거죠.”

무기 국산화는 이렇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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