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인문사회]게딱지만 하든, 고래등만 하든 모든 역사는 방에서 이뤄졌다

입력 | 2013-06-15 03:00:00

◇방의 역사/미셸 페로 지음·이영림 이은주 옮김/752쪽·4만 원·글항아리




방이라는 가장 사적인 공간 안에도 인류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담겨 있다. 위부터 모리츠 루트비히 폰 슈빈트가 그린 ‘아침’, 조셉 시모어 가이가 그린 ‘꽃다발을 둘러싼 싸움, 살롱 안에 있는 로버트 고든 가족’, 베르사유 궁전에 있는 왕비의 침실 사진. 글항아리 제공

몇 년 전 강남 사는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옛 소설에서나 읽어본 ‘식모 방’을 발견했다. 1970년대에 지어진 대형 아파트의 주방 한쪽에 붙어 있는, 한 사람이 누우면 꽉 찰 정도로 코딱지만 한 방이었다. 시골에서 갓 상경한 가난한 소녀들이 서울 부잣집의 부엌데기로 고단한 하루를 보낸 뒤 식모 방에 누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상상하니 기분이 묘했다. 지금이야 창고나 옷장 구실을 하고 있지만 식모 방은 분명 급격한 도시화와 빈부격차가 남긴 우리 현대사 속의 슬픈 공간이다.

프랑스의 저명한 여성 사학자가 쓴 ‘방의 역사’를 읽는 내내 그 식모 방이 떠올랐다. 파리7대학 명예교수로 올해 85세가 된 저자는 프랑스의 스테디셀러 ‘사생활의 역사’(전 5권) 집필에 참여한 인물. 그는 방이라는 가장 사적인 공간 안에 밀폐돼 있던 인류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세상에 끄집어냈다.

그는 왕의 침실부터 부부 침실, 여인의 방, 어린이의 방, 노동자의 방, 호텔 방 등 다양한 유형의 방 안에서 벌어진 역사를 낱낱이 모았다. 은밀한 방의 역사를 방대하게 복원해낼 수 있었던 것은 이 노학자가 옛 편지와 일기, 문학작품을 부지런히 뒤진 덕분이다. 이 책은 곧 여성사, 노동사, 왕실문화사, 성생활사에 이르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이기도 하다.

‘우주의 축소판’으로 불리던 베르사유 궁전에서도 왕의 침실은 가장 신성한 공간이었다. 왕의 침실은 공적 영역이었고 문지기, 이발사, 의상 담당, 변기 담당 등 전문화된 시종들이 들락거렸다. 왕의 침실은 경건한 의례가 행해지는 전시용이었을 뿐 실제 부부관계는 왕비의 처소에서 이뤄졌다. 밤에 시종들은 왕의 침실에서 공식 취침의례가 끝나자마자 왕을 왕비의 방으로 안내했고, 아침 일찍 기상의례를 수행하기 위해 왕을 다시 침실로 모셔왔다.

방은 명작의 산실이기도 하다. 프란츠 카프카는 생계를 위해 낮에는 보험회사 직원으로 일했지만 밤이 되면 자신의 방으로 기어들어가 홀로 온전히 글쓰기에만 몰두했다. 하룻밤 사이에 방안에서 흉측한 벌레로 변해버린 보험회사 외판원의 이야기인 ‘변신’을 써내려갈 수 있었던 것도 그에게 독방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카프카를 꿈꾸는 수많은 사람들의 방에서 밤마다 사각사각 혹은 타닥타닥 소리가 들린다.

인간은 누구나 ‘방을 소유할 권리’를 가진다는 저자의 말에 백 번 동의한다. 특히 집안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고 남성처럼 사무실이나 서재를 갖지 못했던 여성들은 자기 방을 소유하려는 갈망이 컸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21세 때 교사자격시험에 합격한 뒤 할머니 집에 세 들어 살게 되었을 때의 자유와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다. “문을 잠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기분은 절정에 달했다.”

방을 소재로 한 컬러 도판이 풍부하게 실려 독서를 즐겁게 한다. 유럽사 위주로 써졌고, 매끄럽지 않은 번역 투의 문장이 많아 책이 술술 읽히지 않는 점은 아쉽다. 책을 덮을 때쯤이면 이제까지 나를 키워낸 내 방의 역사까지 돌아보게 된다. 자고 읽고 쓰고 명상하고 쉬는 사이 우리는 방에서 인생의 거의 절반을 보내지 않는가.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