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하룻밤의 판타지” 여 “애정과 약속의 상징”
‘프러포즈’ 둘러싼 남녀의 판이한 속내
“전하, 여긴….”
“장옥정, 오직 너만을 위한 전각이다.”
SBS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의 한 장면이다. 당신이 남자고 “아무리 드라마라도 그렇지, 왕이 무슨 후궁한테 촛불 이벤트를 해주냐”라는 말이 목구멍에 차 올라온다면…. 결혼정보업체 듀오가 20, 30대 미혼 남녀 263명을 대상으로 5∼12일 벌인 설문조사 결과를 참조하자. 영화나 드라마 속 프러포즈 이벤트에 대해 여성의 77.3%는 일말의 거부감도 없이 ‘정말 로맨틱하고 부럽다’고 생각한다. 남성은 2.5%만 그렇다.
“프러포즈 어떻게 받았어?”
왕도 프러포즈 이벤트를 열어야 하는 시대, 요즘 젊은 남녀에게 프러포즈 이벤트는 선택이 아닌 필수 사항이다. 인터넷 검색창에 ‘프러포즈’라는 단어를 입력하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남자들의 질문과 이벤트업체의 광고가 함께 화면을 메운다. 신문 사회면에는 ‘촛불 프러포즈 이벤트를 준비하다가 모텔에 화재를 일으켰다’는 사고 기사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여성이 프러포즈를 받은 뒤 남성에게 다시 해주는 ‘답례 프러포즈’, 이미 결혼한 부부가 벌이는 ‘리마인드 프러포즈’도 유행이다.
그 덕택에 관련 산업은 수년간 엄청나게 성장했다. 프러포즈 이벤트용품점 러브헌터의 김종진 대표는 “3∼5월, 9∼11월 등 성수기에는 하루 100건씩 상품이 팔린다”며 “예비신랑이 신혼집에서 프러포즈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 회사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러브하우스 Ⅱ’ 패키지는 작은 초 250개와 조화 장미 50개, 풍선 60여 개 등으로 구성돼 있다. 소극장과 영화관에서 프러포즈 행사를 열어주는 이벤트업체 고프로포즈의 정찬영 매니저는 “2009년 사업을 시작할 때에는 한 달에 10∼15건 진행했는데 요즘은 소극장 이벤트는 한 달에 60건 정도, 영화관 이벤트는 50건 정도 한다”고 말했다.
인터컨티넨탈서울코엑스호텔의 ‘플루토 룸 프러포즈 패키지’는 샴페인과 꽃 장식에 따라 123만여 원까지 드는 만만치 않은 가격이지만 2009년 시작한 뒤로 1000건 이상 팔렸다. 3면 통유리로 아름다운 야경을 즐길 수 있는 30층 스카이라운지 별실에서 제공되는 이 서비스는 인기가 높아 1∼2개월 전 예약이 필수다. 임피리얼팰리스서울호텔은 15일부터 하루 한 커플에게만 야외 수영장에서 프러포즈를 할 수 있게 하는 패키지를 선보인다.
‘거창하게 해줘야’ 부담감
듀오 설문조사에서 ‘프러포즈 이벤트의 의미가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남성들이 가장 많이 고른 보기는 ‘스튜디오 웨딩 사진 같은, 하룻밤의 판타지와 추억용’(36.9%)이라는 문항이었다. 남자들은 이를 ‘결혼하기로 약속한 상태에서 이벤트로’(51.6%) 여는 게 좋다고 여긴다. 그러면서 속으로 “결혼하기로 해놓고 청혼을 다시 하다니 난센스 아닌가”(이상현·35·대기업 직원)라며 못마땅해한다.
반면에 같은 행사를 ‘결혼반지 같은 애정의 표시’(46.8%)라거나 ‘두 사람만의 세리머니’(36.9%)로 보는 여성들은 제대로 된 프러포즈라면 ‘사귀고는 있지만 결혼은 확정하지 않았을 때’(65.2%) 하는 게 옳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결혼식 날짜를 잡은 뒤 여는 이벤트는 타이밍을 놓친 ‘뒷북’인 셈이다.
가장 하거나 받고 싶은 프러포즈 형태에 대한 인식 차이도 상당했다. 남성 4명 중 1명 이상(27.9%)은 ‘야구장이나 콘서트홀처럼 수많은 관중이 있는 곳에서’ 프러포즈하는 것을 최고로 친다. 막상 여성들 사이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는 구혼 방식이었다.
여성 3명 중 1명은 ‘특별한 이벤트 없이 둘만의 추억이 깃든 장소에서 반지를 주며 청혼하는 형태’(29.1%)가 좋다고 답변했다. 남성은 3.3%만이 이 방식을 선호한다. 듀오의 이명길 대표연애강사는 “상당수 남성들이 프러포즈를 거창하게 해줘야 한다는 부담감에 정작 중요한 타이밍을 놓친다”고 꼬집었다. ‘프러포즈는 무조건 남자가 해야 한다’는 강박도 남성이 더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젊은 여자가 부족해서…?
‘연애종결서’ ‘연애야 말해봐’ 등의 책을 쓴 연애컨설턴트 이재목 씨는 여성이 싫어하는 프러포즈 형태로 길거리에서 “○○아, 사랑해!”라고 소리치거나 상대가 일하는 사무실로 이벤트업체 직원을 보내 사랑 노래를 불러주는 행태 등을 꼽았다. 이 씨는 “무조건 비싸게 치러야 한다거나 다른 사람 앞에서 ‘내가 널 사랑한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진 남자가 많다”며 “상대에게 ‘정서적 포만감’을 주는 데 집중하라”고 조언했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된장찌개 잘 끓일 줄 아나?”라며 청혼하던 한국 남자들이 이처럼 180도 바뀐 환경에 처하게 된 이유는 뭘까. 소득 수준과 여권(女權)이 높아진 점, 대중매체의 영향, 업계의 상술과 함께 ‘젊은 여성 인구가 부족해서’라는 가설도 나온다. 성비 불균형이 심화될수록 남성은 결혼을 위해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고 여성의 협상력은 강해진다는 것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만 30∼34세 남성(205만2000명)은 만 27∼31세 여성(184만5000명)보다 20만7000명이 더 많았다. 올해는 그 차이가 31만3000명으로 더 벌어졌다. 30년 전인 1980년대 초반 산아제한과 남아선호 사상으로 남자아이가 여자에 비해 워낙 많이 태어났던 탓이다. 통계청 인구동향과의 김수영 사무관은 “당분간 결혼적령기 남성 인구와 여성 인구의 격차는 점점 더 커지게 된다”고 말했다.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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