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의 들은 朴후보 30초 침묵… 안대희는 뒷목이 서늘했다
2012년 10월 9일 새누리당 국민대통합 심포지엄에 참석한 박근혜 후보(왼쪽)와 안대희 정치쇄신특별위원장. 안대희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으로 있던 2003년 한나라당의 ‘차떼기’ 대선자금 모금 실태를 밝혀낸 주역으로 ‘국민검사’라는 애칭까지 얻었으나 2012년 대법관에서 물러난 지 48일 만에 새누리당 대선캠프에 참여했다. 동아일보DB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장을 맡은 안대희는 전화가 끊어지고 나서야 자기가 레이저를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2003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으로 대선자금을 수사하며 ‘국민 검사’라는 별명까지 얻었고, 대법관을 지낸 뒤 새누리당에 영입된 안대희였다.
정치쇄신특별위원장을 맡은 지 두 달쯤 지난 2012년 10월 초. 안대희는 박근혜 대선후보가 한광옥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당 국민대통합위원장에 임명한다는 소문을 전해 듣고는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DJ(김대중 전 대통령)와 함께 평생 민주화 운동을 해온 한광옥이지만 안대희에겐 어쩔 수 없는 ‘비리 전력자’였다.
“(두 명 중에)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전화를 걸 때만 해도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의 박근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안대희도 태연한 척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지만 내심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 연신 시계만 쳐다봤다. 무려 30초가 흐른 뒤에야 대답이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목소리는 싸늘했다.
그래도 안대희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며칠 뒤인 10월 8일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퇴도 불사하겠다는 배수진을 쳤다.
박근혜도 고심했다. 한광옥은 영호남 대화합을 위해서 버릴 수 없는 카드였고, 안대희도 정치쇄신을 위해선 놓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결국 국민대통합위 위원장은 자신이 직접 맡고, 한광옥은 수석부위원장에 앉히는 것으로 물러섰다.
안대희의 기억. “(발표 전에) 나에게는 한광옥이 ‘부위원장’이라고 말하더니 발표 내용을 보니 ‘수석’을 더 붙였더라고…. 나는 이미 당사 5층 사무실 서랍 속에 사퇴서도 써놓았던 상황이었어. 정말 그만둘 생각을 했었지.”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안대희에게도 박근혜의 레이저는 서늘한 무기였다. ‘절대 그만둘 수 없는’ 새누리당 의원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다.
친박(친박근혜) 의원들도 “권력자의 포스가 강해졌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자신의 뜻과 다르거나 분위기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면 말을 꺼낸 상대방을 무안하게 만들어버리는 ‘박근혜식 소통’ 스타일에도 권력자의 포스가 얹혀졌다. 바로 ‘레이저’였다.
그나마 할 말은 한다는 친박 핵심 최경환 지식경제부 장관(현 새누리당 원내대표)도 레이저를 피하지 못했다.
2010년 초순 어느 날, 김무성 의원 문제 때문이었다. 며칠 전 최경환은 새누리당 초선인 이정현(현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 구상찬(현 주상하이 총영사) 김선동 의원(현 대통령정무비서관) 등과 회동을 가졌다. 장관 취임 이후 오랜만에 친박계 의원들에게 밥을 사는 자리였다. 자연스레 5월로 예정된 차기 원내대표 경선 얘기가 화제에 올랐다.
최경환은 김무성 얘기를 꺼냈다. 박근혜와 사이가 멀어졌어도 친이(친이명박)보다는 그래도 친박 좌장 역할을 했던 김무성이 낫다는 논리였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박근혜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과천에도 일이 바쁘실 텐데, 여의도에 신경을 많이 쓰시네요!”
최경환은 당황했다. 그날 밥자리에서의 대화 내용이 박근혜에게 보고된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험한 어조는 아니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장관 업무나 충실히 하라는 힐난조가 분명했다. 그는 자신의 발언 배경을 설명했지만 이미 싸늘해진 분위기는 쉽게 수습이 되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최경환은 현기환 의원을 만나 서로 ‘다짐 아닌 다짐’을 한다. “이제는 더이상 김무성 얘기를 박 (전) 대표에게 꺼내지 말자!” 현기환도 무려 8차례나 김무성과의 화해를 건의하다 레이저를 맞은 전력이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상도동계 관계자 얘기를 들으면 YS도 박근혜의 레이저에 ‘수모’를 당한 적이 있다. 박근혜가 ‘커터칼 테러’를 당할 때니까 2006년 5월 무렵이다. “어른(YS)이 한때는 박 대표를 괜찮게 생각했다. (커터칼 테러 사건 때) 병문안도 다녀왔다. 그 직후 박 대표가 상도동으로 감사 전화를 걸어왔는데 말끝에 잠시 뜸을 들인 뒤 ‘일일이 감사 전화를 못 드리고 있다. 제가 전화 드린 걸 어디 가서 얘기하시지 말라’고 한 모양이다. 어른이 ‘내가 어디 가서 얘기한다고…’ 하면서 매우 어이없어 했다. 그 후에 사람을 보내기도 했지만 어른의 감정이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상도동 관계자)
그 때문이었을까. YS는 세종시 문제로 MB와 박근혜가 정면충돌하고 있던 2010년 5월, 원내대표 신임 인사차 찾아온 김무성 의원 앞에서 “쿠데타 세력이 가장 나쁜데 국민이 다 잊은 것 같다. 나는 (쿠데타 세력 중에서도) 박정희가 제일 나쁘다고 생각한다”고 독설을 쏟아냈다.
사실 박근혜가 늘 레이저만 쏘는 건 아니다. 의원들이 보고서를 만들어 안봉근 수행비서(현 대통령제2부속비서관)를 통해 전달하거나, 승용차를 탈 때 “시간이 나면 한번 읽어보시라”고 건네주면 며칠 뒤 ‘발신자 제한 표시’로 전화가 걸려온다. 친박계 손범규 전 의원의 전언. “보고서가 쓸 만하다고 생각하면 직접 전화를 걸어 ‘의견이 참 유익하네요, 저 근혜예요’라며 칭찬을 해주곤 한다.”
경선캠프 공보단장을 맡았던 재선의 윤상현 의원도 그런 스타일을 활용했다.
지난해 8월 하순 어느 날, 박근혜가 새누리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뒤 핵심 측근들과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중국집에서 오찬을 했을 때다.
윤상현=“후보님, 사실 내부적으로 5·16(군사정변)을 혁명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고, 현상 자체는 정치변형을 일으킨 쿠데타라고 얘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박근혜=“…. (윤상현이 쳐다봤지만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푹 숙임)”
윤상현=“내부적으로 토론을 해서 (빨리) 정해야 합니다!”
박근혜=“(윤상현을 쳐다보며) 식사하면서 무슨 토론회를 해요!”
윤상현=“….”
순간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썰렁해졌고, 윤상현은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대선 이슈였다. 윤상현은 대신 두 차례에 걸쳐 보고서를 만들었다. 즉답은 없었지만 한 달쯤 뒤 박근혜는 5·16과 10월 유신 등 과거사에 대한 사과 기자회견을 한다.
김태흠 의원도 그즈음 아찔한 경험을 했다. 충남 보령-서천이 지역구인 그는 선진통일당과 합당을 위한 막후 협상의 메신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박근혜에게 전화 보고를 할 때였다.
김태흠=“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도 만났는데 김종필 전 총리(JP)도 한 번 만나셔야죠?”
박근혜=“(단호한 어조로) 앞에 두 분은 전직 대통령이셨잖아요.”
김태흠=“3김이라는 단어가 왜 나왔겠습니까. 영남과 호남, 충청권을 상징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
박근혜=“….”
김태흠은 순간 아차 싶었다. 그래서 사태 수습을 위해 이렇게 얘기했다.
김태흠=“제가 직접 후보님을 뵙고 말씀을 드렸다면 대선 승리를 위해 무릎을 꿇고 간청했을 겁니다.”
박근혜=“(또다시 침묵이 흐른 뒤) 알겠습니다!”
‘알겠다’고 했지만 김태흠에게는 부정적 뉘앙스로 들렸다. 침묵의 레이저 탓이었다. 하지만 박근혜는 흘려듣지 않고, 조용히 JP의 자택 방문을 추진했다.
박근혜의 레이저. 권위주의 청와대에서 사실상 ‘퍼스트레이디’로 살아온 세월, 비극적 개인사, 그리고 권력 주변의 표리부동한 군상에 대한 깨달음과 18년간의 ‘블랙아웃’이 복합적으로 교직된 캐릭터인지 모른다. 또 하나, 정치권이 헌정 사상 처음으로 접하는 여성 리더십에 대한 몰이해가 ‘레이저’라는 충격으로 표현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건, 박근혜의 레이저는 MB 5년의 국정운영을 때로 긴장시키고, 때로 춤추게 한 주요 변수 중 하나였다.
고성호 기자 sung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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