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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문의 소설 속 인생]어느 초라하고 나약한 순교자

입력 | 2013-06-18 03:00:00

그레이엄 그린의 ‘권세와 영광’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

그레이엄 그린이 작고하기 전인 1970, 80년대에는 노벨 문학상 발표 시기가 다가오면 여러 매체가 그가 수상할 것에 대비해서 특집을 준비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끝내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하고 타계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소설이 너무 재미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대부분 작품에서 주인공들은 정말 절박한 상황에서, 순간순간 곡예와 같이 생존하기 때문에 독자는 숨 가쁘게 읽어 내려가게 된다. 그래서 그는 ‘대중작가’의 성공을 누렸지만 그에 따른 불이익도 겪어야 했다.

그린이 대중작가였다 하더라도 결코 대중 영합작가가 아니라는 점은 그의 작품에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는 가톨릭 신앙이 보여준다. 가톨릭 작가라고 해서 그가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고 구교의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작품을 쓴 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인물 중에서 가톨릭 신앙으로 인해 곤경을 모면하거나 쉽게 구원을 얻는 인물은 없다. 오히려 종교로 인하여 그들의 고민은 심화되고 종교의 계율에 손발이 묶여서 질곡을 탈출하지 못한다. 어찌 보면 종교가 인간존재의 조건을 더 어렵게 한다.

그러나 가톨릭 신부의 박해와 순교를 담은 ‘권세와 영광’(1939년 출간)은 그의 가톨릭 소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절대적인 신앙을 표출하는 작품이다. 멕시코 혁명 정부의 가톨릭 박해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멕시코 혁명의 원인이나 전개 과정, 양상 등은 탐구하고 있지 않다. 다만, 나약한 인간을 순교자로 만들 수 있는 힘의 본질을 탐색할 뿐이다.

이 소설의 신부는 정상적인 상황에서였다면 가톨릭교회의 수치가 되었을 인물이다. 그는 술에 절어 살고 사생아까지 있다. 체격은 왜소하고 치아는 충치투성이이고 난처한 상황에서는 킥킥거리며 웃는다. 그가 신앙을 위해 기꺼이 또는 굳건히 일신의 안락과 신변의 안전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설마 곧 상황이 바뀌겠지, 하고 머뭇거리다가 나중에는 모든 신부가 도망쳤지만 자기는 남았다는 자부심 때문에 계속 머물렀다.

그러나 그는 고고한 신부였던 좋은 시절에가 아니라-멕시코에서 신부는 엄청난 권력과 특권을 누리는 존재였다-쫓겨 다니며 고난을 겪고 죄를 지으면서 죄 많은 인간을 진실로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늘 자유 주(州)로의 탈출을 계획하지만 마음 한쪽으로는 자기는 떠날 수 없음을, 하느님이 떠나지 못하게 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못 떠날 이유 또는 핑계가 생기면 일변 절망, 일변 안도하며 포기한다. 두 번이나 죽어가는 사람에게 종부성사(終傅聖事·병자성사)를 베풀기 위해 탈출을 포기하고 종내는 살인강도의 종부성사를 위해 함정으로 걸어 들어가 체포되어 처형을 당한다.

그는 도망 다니다 피곤에 지쳐서 몸을 가눌 수 없을 때에도 세례식과 고해성사에 목마른 농부들을 위해 밤새워 고해를 듣고 세례를 준다. 또 가진 돈 전부를, 당장 허기를 채울 잔돈도 남기지 않고, 미사에 쓸 포도주를 사는 데 쓴다. 그러나 그는 중위가 그를 잡아들이기 위해 그의 교구에서 죄 없는 농부를 인질로 잡을 때 자기가 바로 그들이 찾는 신부라고 나서지 못하고 겨우, 한창 일할 젊은이 대신에 노동력이 없는 자기를 잡아가라고 제안할 뿐이다. 이는 물론 신부의 역할이 한 명 농부의 역할보다 무한히 크다는 이유로 정당화될 수도 있지만 신부는 자신의 비겁성을 자책한다. 죽음을 앞두고도 그는 모든 인간을 향해, 어린나이에도 되바라지고 삐뚤어진 자기 사생아에게만큼, 무한한 사랑이 샘솟지 않음에 괴로워한다.

그를 기어코 체포해서 처형하는 중위는 사실 이 소설에서는 신부보다 더 영웅적인 자질이 많다. 그는 의지와 신념의 사나이이고 자기 이념의 실현을 위해서는 냉혹하지만 인간미도 없지 않다. 그는 민중에게 마약과 같은 종교를 몰아내고 현실적인 정의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 신부를 제거하려고 마을마다 죄 없는 백성을 인질로 잡아 신부를 밀고하지 않으면 하나씩 처형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한편 5페소의 벌금이 없어 감금된 잡범(실지로 신부)을 방면하면서 5페소를 쥐여준다.

마침내 신부를 잡았을 때 중위는 그 때문에 죄 없는 백성을 셋이나 죽였다고 분노를 터뜨린다. 그러나 그와 대화하면서 존경과 연민을 느끼고 그에게 호의를 베풀고 싶어 한다. 가톨릭교회를 무신론적 정의로 대체하려는 중위의 신념은 대안적 이데올로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주위의 썩어빠진 혁명권력층이 증명한다.

신부와 그를 밀고하는 혼혈인의 야릇한 관계는 그린의 역량을 유감없이 드러내 준다. 가롯 유다와 같은 교활한 혼혈인에게 신부는 이상하게 너그럽다. 거머리처럼 감겨오면서 자기를 못 믿는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혼혈인의 뻔뻔함에 질려서 그의 투정을 받아주고 속수무책으로 간호도 해주고 자기 노새를 앓는 그에게 양보한다.

혼혈인은 신부에게 걸린 현상금을 마치 자기가 신부에게 받아야 하는 빚처럼 생각하고 신부도 마침내 그를 숙명처럼 받아들여서 둘은 미묘한 동반자가 된다. 그를 경찰에 넘기고 나서 자기를 축복해 달라는 혼혈인의 요구에 신부는 자신의 축복으로 그의 죄를 덮을 수 없다고 타이르지만 혼혈인은 막무가내로 떼를 쓰고 신부는 그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약속한다.

신부는 두려움과 후회의 밤을 보내고 처형되고, 그날 밤 그곳에는 새로운 신부가 나타난다. 신앙의 불멸을 입증이라도 하는 듯이.

겁 많은 결함투성이의 신부가 신의 권세와 영광을 입증하는 순교자가 될 수 있다면 우리에게도 가능할까? 그린은 답을 찾아보기를 촉구한다.    
    
● 권세와 영광 줄거리는
     
   


1930년대 멕시코, 공산정권에 장악된 주(州)에서는 기독교가 금지되고 신부는 결혼해서 환속하지 않으면 반역자로 처형당했다. 숨어 다니며 사제의 역할을 수행하던 신부들이 거의 다 잡혀 죽거나 신앙 자유지역으로 탈출한 어느 주에 단 한 명의 신부가 남아 있었다. 이 신부는 어느 날 기독교 공인 지역으로 가는 배를 타려다 아파 죽어간다는 원주민 여자에게 종부성사를 베풀러 가느라 배를 놓친다.

신부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거액의 현상금까지 걸린다. 신부는 8년 동안이나 숨어 다니면서 미사를 집전하고 세례를 주고 고해성사를 들어 주었다. 그 고단한 삶에 지쳐 술에 찌들었고 지치고 낙담한 어느 날, 가정부와의 사이에 아이도 갖게 되었다. 신부는 검거를 피해 종교의 자유가 있는 고향 카르멘을 향해 가다 한 혼혈인에게 발각된다. 가까스로 그를 따돌렸지만 미사에 쓸 포도주를 구하려다 금주법 위반으로 유치장에 갇힌다. 이튿날 벌금 대신 유치장 청소를 하고 풀려난 신부는 다시 도주하다 아기가 총에 맞아 죽은 원주민 여자를 만난다. 아기를 교회에 묻고 싶어 하는 여자와 이틀을 걸어서 교회에 도착한 후 도주를 계속 하려다 폭우 속에서 쓰러진다. 중년의 독일인 남매의 환대로 기력을 회복한 신부는 동네 사람들을 모아 미사를 올리고 세례와 성찬식을 행한다. 그리고 떠나려는데 신부를 쫓던 혼혈인이 나타나 미국인 권총강도가 죽어가고 있다며 종부성사를 원한다고 한다. 신부는 자신을 끌어들이려는 술책인줄 알면서도 따라 나선다. 강도는 참회는 안하고 신부에게 도주하라고 재촉하다가 숨을 거둔다. 곧이어 경찰이 나타나고 신부는 체포되어 반역죄로 사형을 언도받고 형 집행을 당한다. 신부가 처형된 날 밤, 새로운 신부가 그곳에 숨어든다.

※다음 회에는 조지 오웰의 ‘1984’가 소개됩니다.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