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엄 그린의 ‘권세와 영광’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
그린이 대중작가였다 하더라도 결코 대중 영합작가가 아니라는 점은 그의 작품에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는 가톨릭 신앙이 보여준다. 가톨릭 작가라고 해서 그가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고 구교의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작품을 쓴 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인물 중에서 가톨릭 신앙으로 인해 곤경을 모면하거나 쉽게 구원을 얻는 인물은 없다. 오히려 종교로 인하여 그들의 고민은 심화되고 종교의 계율에 손발이 묶여서 질곡을 탈출하지 못한다. 어찌 보면 종교가 인간존재의 조건을 더 어렵게 한다.
그러나 가톨릭 신부의 박해와 순교를 담은 ‘권세와 영광’(1939년 출간)은 그의 가톨릭 소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절대적인 신앙을 표출하는 작품이다. 멕시코 혁명 정부의 가톨릭 박해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멕시코 혁명의 원인이나 전개 과정, 양상 등은 탐구하고 있지 않다. 다만, 나약한 인간을 순교자로 만들 수 있는 힘의 본질을 탐색할 뿐이다.
그러나 그는 고고한 신부였던 좋은 시절에가 아니라-멕시코에서 신부는 엄청난 권력과 특권을 누리는 존재였다-쫓겨 다니며 고난을 겪고 죄를 지으면서 죄 많은 인간을 진실로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늘 자유 주(州)로의 탈출을 계획하지만 마음 한쪽으로는 자기는 떠날 수 없음을, 하느님이 떠나지 못하게 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못 떠날 이유 또는 핑계가 생기면 일변 절망, 일변 안도하며 포기한다. 두 번이나 죽어가는 사람에게 종부성사(終傅聖事·병자성사)를 베풀기 위해 탈출을 포기하고 종내는 살인강도의 종부성사를 위해 함정으로 걸어 들어가 체포되어 처형을 당한다.
그는 도망 다니다 피곤에 지쳐서 몸을 가눌 수 없을 때에도 세례식과 고해성사에 목마른 농부들을 위해 밤새워 고해를 듣고 세례를 준다. 또 가진 돈 전부를, 당장 허기를 채울 잔돈도 남기지 않고, 미사에 쓸 포도주를 사는 데 쓴다. 그러나 그는 중위가 그를 잡아들이기 위해 그의 교구에서 죄 없는 농부를 인질로 잡을 때 자기가 바로 그들이 찾는 신부라고 나서지 못하고 겨우, 한창 일할 젊은이 대신에 노동력이 없는 자기를 잡아가라고 제안할 뿐이다. 이는 물론 신부의 역할이 한 명 농부의 역할보다 무한히 크다는 이유로 정당화될 수도 있지만 신부는 자신의 비겁성을 자책한다. 죽음을 앞두고도 그는 모든 인간을 향해, 어린나이에도 되바라지고 삐뚤어진 자기 사생아에게만큼, 무한한 사랑이 샘솟지 않음에 괴로워한다.
그를 기어코 체포해서 처형하는 중위는 사실 이 소설에서는 신부보다 더 영웅적인 자질이 많다. 그는 의지와 신념의 사나이이고 자기 이념의 실현을 위해서는 냉혹하지만 인간미도 없지 않다. 그는 민중에게 마약과 같은 종교를 몰아내고 현실적인 정의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 신부를 제거하려고 마을마다 죄 없는 백성을 인질로 잡아 신부를 밀고하지 않으면 하나씩 처형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한편 5페소의 벌금이 없어 감금된 잡범(실지로 신부)을 방면하면서 5페소를 쥐여준다.
마침내 신부를 잡았을 때 중위는 그 때문에 죄 없는 백성을 셋이나 죽였다고 분노를 터뜨린다. 그러나 그와 대화하면서 존경과 연민을 느끼고 그에게 호의를 베풀고 싶어 한다. 가톨릭교회를 무신론적 정의로 대체하려는 중위의 신념은 대안적 이데올로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주위의 썩어빠진 혁명권력층이 증명한다.
혼혈인은 신부에게 걸린 현상금을 마치 자기가 신부에게 받아야 하는 빚처럼 생각하고 신부도 마침내 그를 숙명처럼 받아들여서 둘은 미묘한 동반자가 된다. 그를 경찰에 넘기고 나서 자기를 축복해 달라는 혼혈인의 요구에 신부는 자신의 축복으로 그의 죄를 덮을 수 없다고 타이르지만 혼혈인은 막무가내로 떼를 쓰고 신부는 그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약속한다.
신부는 두려움과 후회의 밤을 보내고 처형되고, 그날 밤 그곳에는 새로운 신부가 나타난다. 신앙의 불멸을 입증이라도 하는 듯이.
겁 많은 결함투성이의 신부가 신의 권세와 영광을 입증하는 순교자가 될 수 있다면 우리에게도 가능할까? 그린은 답을 찾아보기를 촉구한다.
● 권세와 영광 줄거리는
※다음 회에는 조지 오웰의 ‘1984’가 소개됩니다.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