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과거정부의 사죄 그대로 지켜 가야지 말바꾸면 역사 되풀이”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왼쪽)과 호리 와타루 씨가 1958년 당시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한국에 식민통치를 사죄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친필휘호 내용인 ‘초심불가망(初心不可忘·처음 먹은 마음 변하지 않겠다)’을 가리키며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도쿄=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왜곡된 역사 인식으로 물의를 일으킨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일본 총리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비서로서 30년간 보좌한 호리 와타루(堀涉·87) 씨가 강조한 말이다.
호리 씨는 최근 일본을 방문한 한일관계 문제의 권위자인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85)과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만나 환담하며 이같이 밝혔다. 호리 씨의 말은 1993년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 1995년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를 현 일본 정부도 계승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베 총리는 침략을 부인하고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의 증거가 없다는 잘못된 역사 인식을 보여 동북아시아 주변국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비난을 자초했다.
최 원장이 “일본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해 한국에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사죄하면 과거가 과거의 일에 머물겠지만 그러지 않으면 미래에도 계속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하자 호리 씨는 “동감한다. 과거 정부의 사죄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화답했다.
술잔을 기울이며 이어진 두 사람의 환담에서 아베 총리 이름은 한 번도 거론되지 않았다. 한일관계의 민감성을 너무도 잘 아는 두 원로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이었다. 그러면서도 아베 총리와 우경화된 일본 정치인들이 아프게 새겨들어야 할 얘기들을 빼놓지 않았다.
▼ 최서면 “외손자가 외조부 결단 망치고 있다”… 호리 “모호한 정치적 발언은 피해야 한다” ▼
호리 와타루=기시 전 총리와 시나 전 외상이 한일관계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결단을 했다.
최 원장은 “기시 전 총리와 시나 전 외상이 결단해 한일관계를 개선했는데 기시 전 총리의 외손자(아베)가 이렇게 망치니 이게 뭔가. (기시 전 총리가) 묘지에서 나오겠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호리 씨는 쓴웃음만 지었다.
최=미래 지향적 한일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나.
호리=한일 쌍방이 서로 흥분하지 않고 대화를 나누면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선택하고 공동의 목표, 공통분모를 찾아야 한다. 쌍방에 해가 되는 일은 피해야 한다.
이 환담에 앞서 최 원장은 호리 씨가 참석한 가운데 일본 전직 관료와 학자 20여 명과 만찬을 하며 일본이 왜 식민통치의 역사를 사죄해야 하는지 역설했다.
최 원장은 만찬 시작 전 대뜸 자신의 자리 뒤쪽 벽에 자신이 직접 쓴 ‘초심불가망(初心不可忘)’이라는 글을 붙였다.
“이 글은 기시 전 총리가 1958년 이승만 대통령에게 사죄하면서 야쓰기 특사를 통해 이 대통령에게 보낸 친필 휘호의 내용이다. ‘한국에 사죄하고 한일관계를 개선시키겠다는 그 첫 마음이 변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그렇게 시작된 만찬에서 최 원장은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공개했다. 1977년 기시 전 총리가 연세대에서 정치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을 때의 일이다. 한 목사가 기도하며 “하나님 너무하십니다. 언제는 이들과 싸우라 하시더니 이제는 명예를 주라고 하십니까. 무슨 이런 세상이 다 있습니까!”라며 복잡한 심경을 토로했다. 최 원장의 통역을 통해 그 내용을 그대로 들은 기시 전 총리의 얼굴이 벌게졌다가 하얘졌다가 했다. 그럼에도 그는 그날 무척 감격스러워했다.
만찬이 끝나갈 무렵 일본 외무성 고위 관료 출신의 한 인사가 최 원장에게 “아베 정부도 문제지만 반일 감정에 편승한 박근혜정부의 대일 강경책도 잘못된 것 아닌가”라고 물었다.
최 원장은 기다렸다는 듯 바로 답했다. “전 세계에서 일본만큼 한국의 좋은 이웃이 될 만한 국가도 없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일본을 그런 이웃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건 일본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식민통치에 대한 사죄만큼은 한국인들이 양보할 수 없는 기본 전제다. 하지만 지금 정치 지도자들이 침략 사실마저 부인하면서 당신들과 선배들이 이룩한 일이 무너지고 있다. 한일관계의 미래를 위해 일본에 어떤 지혜가 있는가. 나는 그걸 묻고 싶다.”
일본 측 참석자들 모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쿄=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