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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紙휴가 아시나요

입력 | 2013-06-20 03:00:00

■ 휴가혁명 어디까지
“원하는 때 원하는 기간만큼 떠나라”… KT 최장 1년간 유급 안식휴가
삼성전자 女직원 위한 ‘난임 휴가’… “생산성 향상” vs “비현실적 제도”




입사 5년차인 이베이코리아의 송하영 옥션 의류팀장(36)은 올해 1월 4주간 안식휴가를 다녀왔다. 첫 2주는 자녀와 가족을 위해 집에서 시간을 보냈고 나머지 2주는 미국과 멕시코로 혼자 여행을 떠났다. 송 팀장은 “회사가 6개월 전부터 틈틈이 안식휴가 대상자라는 사실을 주위에 알린 덕분에 업무 공백이 없도록 미리 조율했다”고 말했다.

○ 휴가, 유연해졌다

국내 기업의 휴가 제도가 유연하게 바뀌고 있다. ‘휴가철’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조직원에게 시기와 기간을 자유롭게 선택하게 하고 다양한 종류의 휴가를 도입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몇 해 전만 해도 정보기술(IT)업계 또는 광고업계, 외국계 기업에서나 볼 수 있던 휴가 제도가 기업 전반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삼성전자는 3월 아이를 갖는 데 어려움을 겪는 여성 임직원을 위해 ‘난임 휴가제’를 도입했다. 지속적 노동 투입이 요구되는 제조업계에서 처음 도입된 사례여서 주목을 받았다. 지금까지는 여성 비율이 높은 은행권 등에서만 시행돼 왔다. 삼성전자는 또 2010년 휴가기간에 해외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올해는 삼성디스플레이 삼성의료원 등 다른 계열사로 확대돼 삼성그룹 임직원 300여 명이 베트남 미얀마 캄보디아로 봉사활동을 다녀올 계획이다.

KT는 일정 기간 근속한 직원에게 장기간 안식휴가를 다녀올 수 있게 한다. 한두 주 정도가 아니다. 10년차는 6개월, 20년차는 1년간 유급 휴가를 준다. 이 회사는 20년 이상 장기 근속자에 대해선 창업 준비 휴직 제도도 운영하고 있다. 같은 통신업계의 SK텔레콤 역시 만 10년차 임직원에게 45일의 장기 휴가를 준다.

연차를 한 번에 몰아 써서 휴가를 2, 3주 동안 다녀올 수 있는 ‘리프레시 제도’를 도입한 기업도 늘었다. 대우조선해양 두산그룹 현대중공업 하이네켄코리아 현대백화점그룹 에쓰오일 신한은행 한국관광공사 등이 이 제도를 도입했다. 신한은행은 휴가를 2주 연속으로 쓰지 않으려면 회사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24시간 운영되는 반도체 공장을 가진 SK하이닉스는 휴가를 원하는 때 쓸 수 있게 한다. 현대·기아자동차도 생산직 근로자를 제외하면 시기와 상관없이 최대 5일씩 쓰는 ‘가족사랑휴가’ 제도를 도입했다.



▼ “안식월 휴가, 인재영입 중요한 요소” ▼

롯데백화점도 6∼9월에만 가던 휴가를 아무 때나 갈 수 있게 하는 분산휴가제를 올해 도입했다. 이 백화점에는 상사가 자신의 연차를 후배에게 몰아줄 수 있는 제도도 있다.

○ 업무 효율성 향상 vs 휴가 못 가는 현실

직장인들은 유연한 휴가 제도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 은행에서 근무하는 7년차 이희선 씨(34·여)는 “단순히 사무실 자리를 지키는 게 일을 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회사가 먼저 깨뜨려주는 것을 보고 우리 회사가 꽉 막히지 않고 깨어있는 조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2011년부터 15∼20년 이상 회사를 다닌 팀장급에 한해 의무적으로 ‘안식월 휴가제’를 시행하는 현대백화점그룹은 휴가를 다녀온 60여 명을 대상으로 만족도를 평가했다. 그 결과 ‘매우 만족’이라는 응답이 80%를 넘었고 ‘불만’이라는 응답은 단 한 건도 없었다.

물론 모든 기업이 휴가 제도를 유연하게 운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제도를 도입하더라도 실제 현장에선 제도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길게는 한 달 이상 자리를 비우면 경쟁에서 도태될 수도 있고, 자신의 업무를 누군가 떠맡아야 하는 부담도 있기 때문이다.

한 전자회사는 지난해 전체 연구인력에 대해 최장 4주의 리프레시 휴가를 준다고 발표했지만 아직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특정 직군에 대해서만 장기간 쉴 수 있게 하는 규정이 없기도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을 감안한 탓인지 실제로 휴가를 쓰겠다고 하는 직원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인력에 여유가 없는 중소기업의 사정은 훨씬 열악하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지난해 조사에서 중소기업 대표 200명 중 54.5%에 해당하는 109명이 ‘휴가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회사 업무가 바쁘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가장 많았다. 경기 파주시의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휴가를 갔다가 물량을 제때 생산하지 못해 어렵게 따낸 납품계약을 날려버릴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 휴가의 효과

기업들은 휴가 제도가 직원들의 애사심을 높이고 장기적으로는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보고 있다. 소비가 늘어 국가 경제에도 도움이 된다는 분석도 있다. 한 대기업 인사팀 관계자는 “휴가를 다녀온다고 모든 사람이 갑자기 창의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성원들이 재충전을 하면 근로의욕이 높아지고, 스트레스 누적에 따른 사고 발생 위험도 줄어드는 장점이 있다”고 평가했다.

파격적인 휴가 제도가 훌륭한 인재를 끌어들이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한 기업 관계자는 “최근 채용된 신입사원들은 안식월 휴가제가 있다는 점을 입사의 중요한 이유로 꼽았다”고 밝혔다.

유연한 휴가 제도의 도입에는 최고경영자(CEO)의 의지가 크게 작용한다. 두산그룹 박용만 회장은 지난해 앞장서서 2주간 여름휴가를 떠나며 직원들의 휴가를 독려했다. 하이네켄코리아의 얀 아리 스밋 사장은 “휴가 첫 주는 일에서 벗어나는 시간이고, 둘째 주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필요하고, 셋째 주가 돼야 진정으로 쉴 수 있다”며 직원들의 3주 휴가를 권장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장관석·염희진 기자 jk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