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보대행사 선정 상식밖 입찰공고
대한주택보증 입찰공고문 캡처
박 씨는 유심히 공고문을 읽다가 분노했다. 대한주택보증이 올린 공고문에는 “제안서 평가 결과 사업자로 선정되지 않은 제안서의 내용도 우수한 내용으로 판단되어 사업수행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사업내용에 포함될 수 있음”이란 조항이 있었다. 입찰에 탈락한 업체들의 우수한 아이디어를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가져다 쓰겠다는 의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는 공기업이 ‘갑’의 지위를 이용해 ‘을’인 입찰업체의 지식재산권을 무단으로 침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입찰업체들은 대부분의 정부기관과 공기업 사업이 최저가 입찰 방식으로 이뤄져 가격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아이디어까지 빼앗길 수 있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한 광고업체 대표는 “입찰업체들이 수백만 원의 비용과 인력을 들여 제안서를 준비하지만 낙찰받기는 하늘의 별따기”라며 “더구나 ‘갑’이 아이디어만 빼 쓰고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려는 발상에 화가 난다”고 말했다.
대한주택보증 측은 공고문이 논란이 되자 19일 동아일보와 통화에서 “그런 의도로 조항을 적은 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논란이 된 부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며 “이미 나간 공고문을 수정할 수는 없고 입찰 제안 설명회에서 입찰에서 탈락한 제안서 내용은 쓰지 않겠다고 설명하겠다”고 해명했다.
정부기관이나 공기업이 입찰 과정에서 갑의 지위를 남용하는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19일 본보가 ‘나라장터’를 살펴보니 발주처인 정부기관이나 공기업에 지나치게 유리해 보이는 계약조건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광주테크노파크는 3D융합상용화지원센터 홈페이지 구축 사업을 발주하면서 ‘갑(발주처)의 정책 변경 등 불가피한 경우 본 사업의 일부 또는 전부의 과업 지시를 변경할 수 있다’ ‘본 과업 지시서에 누락된 사항이라도 사업목적 달성을 위해 의도한 바와 같은 완전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공하여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사실상 모든 변경이나 누락 사항에 대해 업체에만 책임을 지우는 식이다.
인천시의 시정홍보 책자 제작 과업 지시서에는 “발주처가 본 사업이 변경되어 발행 계획을 취소하고자 할 때는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으며, 계약업체는 계약 해지에 따른 일체의 이의 제기나 기타 청구를 할 수 없다”는 문구도 있다.
조동주·김성규 기자 dj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