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51>DJ 납치 1
도쿄에서 납치된 지 5일 만에 동교동 집으로 돌아온 김대중 씨가 1973년 8월 13일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피랍 닷새’ 동안의 일을 설명하던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동아일보DB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1971년 4·27 대통령선거에서 불과 94만 표 차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석패(惜敗)한 DJ는 대선이 끝난 직후인 71년 5월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 뒤 신병 치료차 도쿄를 자주 왕래하고 있었다. 72년 10월 유신 선포도 일본에서 들었다. 그는 절망에 빠진다.
‘이국땅 호텔방을 서성거렸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던 국민들은 어떤 심정으로 이 사태를 받아들이고 있을 것인가…가슴에 뜨거운 그 무엇이 올라왔다. 그것은 슬픔이었고 분노였다.’(‘김대중 자서전’)
이듬해인 1973년에는 아예 반독재투쟁을 이끌 해외 구심체로 ‘한국 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한민통)를 세우기로 하고 여름으로 접어드는 7월 6일 워싱턴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미국 본부 발기인 대회까지 마친다. 그리고 7월 10일 일본 본부 결성을 위해 도쿄로 돌아와 8월 15일 있을 창립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1973년 8월 8일 오후 도쿄의 날씨는 덥고 습했다.(‘김대중 자서전’)
DJ는 그랜드 팰리스 호텔에 머물고 있던 민주통일당 양일동 총재 방(2211호)에서 같은 당 김경인 의원과 셋이 점심을 먹고 다음 약속장소로 가기 위해 김 의원과 함께 방을 나섰다. 그런데 갑자기 복도에서 건장한 사내 대여섯 명이 튀어나오더니 DJ의 멱살을 잡고 양 총재 옆방으로 끌고 갔다. 닷새에 걸친 ‘지옥’의 시작이었다.
도쿄에서 사라진 DJ는 5일 만인 8월 13일 서울 동교동 집으로 걸어 들어와 다시 세상을 놀라게 한다. 다음은 DJ가 생환 직후 기자들에게 전한 ‘피랍 닷새’에 대한 증언(동아일보 1973년 8월 14일자)이다.
그는 육지에서 내려 자동차를 두 번 갈아탄 뒤 누군가의 집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들’이 주는 알약 2개(수면제)를 먹고 깨어보니 2층 양옥이었다고 한다. 입을 틀어 막히고 손발이 묶이고 눈도 가려진 채 12일 아침을 맞았다. 13일 저녁 8시가 되자 ‘그들’이 “상부에서 석방하라고 해서 풀어준다”며 승용차에 태웠다.
‘두 시간 동안 달리면서 그들과 간혹 얘기를 나눴다. 그들은 자신들이 ‘구국동맹행동대’라고 했다. 무엇 하는 단체냐 물었더니 한참 있다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반공하는 단체’라고 했다. …이윽고 차가 멎었다. 동교동 동사무소 근처에 내려놓으며 “3분 동안 돌아서서 용변을 보는 체하다 안대를 풀고 집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나는 약속대로 서 있는 자리에서 소변을 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있는 붕대를 풀었다. 한참 지나자 사물이 보였다. 주유소 간판이 낯익었다.’(‘김대중 자서전’)
1972년 10월 11일에 집을 떠났으니 10개월 만의 귀향이었다.
‘멀리 더위를 식히려 길가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침에 걸어 나온 길처럼 눈에 익었다. (마치) 저녁 산책을 마치고 돌아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대문 앞에 서서 문패를 올려다봤다. ‘김대중 이희호’ 문패가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았다. 골목 안은 조용했다. 집안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대한민국, 한여름 밤,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막 퇴근한 가장처럼.’(‘김대중 자서전’)
‘오른쪽 아랫입술과 왼쪽 위가 터져 피가 맺혔고 오른쪽 발목에 두 줄의 깊은 상처를 입은 채 연한 하늘색 샤쓰에 줄무늬가 있는 고동색 바지를 입고 집에 돌아온 김씨는 실종된 경위를 차근차근 설명했다…집에 당도, 세 번 벨을 누르고 집안에 들어섰다고 말하면서 웃는 얼굴로 “나는 하도 겁나는 일을 많이 당해서 아무렇지 않다”고 놀란 가족들을 위로했다고 밝혔다.’
도대체 그를 납치한 괴한들은 누구이며 그는 어떻게 갑자기 풀려난 것일까?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