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死인데 지체없이 화장-보험금 청구… 가족이 수상하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교통사고로 위장된 한명수 씨의 사망 당시 모습. 현장에 출동했던 119구급대원이 건네준 사진을 정창호 경위는 아직까지 자신의 휴대전화에 저장해 가지고 다닌다. 정창호 경위 제공
한 씨가 사망한 지 보름 후 사건이 일어난 농장을 둘러보던 경기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소속 정창호 경사(당시 41세·현 경기 광주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 경위)가 중얼거렸다. 당직 근무를 마치자마자 평택으로 차를 몰고 내려온 그였다. 사고를 낸 B 씨(40)가 가로등이나 별다른 조명시설도 없는 농장에서 왜 굳이 후진으로 주차를 시도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농장 앞 공터는 트럭 전면으로 들어가 차를 세운 뒤 그대로 다시 차를 돌려서 나올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넓었다. 의심스러웠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보험금’이라는 세 글자가 스쳤다.
숨진 한 씨는 두 개의 생명보험에 가입돼 있었다. 2006년 4월 4일과 12월 8일에 가입한 이 두 보험의 월 보험료는 총 32만5400원. A 씨가 운영하는 인력사무소에서 청소, 잔심부름 등 허드렛일을 하며 일정한 수입 없이 살아온 한 씨에게는 부담스러운 액수였다.
알아보니 보험료는 A 씨가 대신 납부해주고 있었다. A 씨는 사고가 발생할 때까지 자신이나 가족들 명의로 가입한 보험의 보험료보다 많은 금액을 한 씨의 보험료로 내고 있었다. 그리고 4월에 가입한 보험은 그해 5월에, 12월에 가입한 보험은 다음 해 3월에 보험금 수령자가 A 씨로 변경됐다. 한 씨가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때 받게 되는 사망보험금도 8억 원이 넘었다. 교통재해사망특약이 최고 한도로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한 씨가 교통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일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보통 사람들은 사망을 전제로 하는 생명보험에 가입할 때 수술, 입원 등 치료비도 함께 보상받을 수 있는 특약을 주로 설정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누군가를 죽여 보험금을 타낼 속셈으로 생명보험에 가입하는 ‘보험금 살인’에서는 사망보험금을 최대한 받아낼 수 있도록 특약을 구성한다. 실제 올해 3월 부산 해운대구 동백섬 누리마루 선착장에서 발생한 보험금 살인 사건의 경우 남편은 부인을 살해하기 3개월 전 보험을 갱신하며 사망보험금을 대폭 높이는 특약을 넣어 모두 11억2000여만 원의 보험금을 받을 수 있게 했다. 그는 함께 타고 있던 차량을 바다에 빠뜨려 아내를 살해한 뒤 운전 미숙으로 인한 차량 추락사로 위장하려 했다. 또 범행에 앞서 보험금 수령자를 자신들로 변경해 놓는 특징도 있다.
“시신이 화장돼 증거가 없다”
다른 실마리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나왔다. 사건 발생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관할 소방서를 찾아 근무일지, 최초 신고 내용 등을 확인하던 정 경사에게 119 구급대원 한 명이 “직접 찍었다”며 사진 다섯 장을 건넸다.
사진 속 한 씨의 배 위에는 자로 잰 듯이 정확히 심장 부근을 지나간 트럭의 바퀴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눈 주위가 부어 있었고 눈꺼풀의 출혈, 안면 울혈도 보였다. 질식사에서 관찰되는 특징이었다. 누군가 미리 한 씨를 목 졸라 살해한 뒤 차 사고로 위장한 것이라는 의심이 들었다.
시신이 이송됐던 안중 백병원에는 한 씨의 복부 컴퓨터단층촬영(CT) 결과가 남아 있었다. 정 경사는 CT를 들고 경북대 법의학과 교수를 찾아갔다. 교수는 “한 씨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1t 트럭이 배 부위를 밟고 지나갔다면 복부 손상으로 다량의 피가 고여 있어야 한다”며 “CT 결과에는 복부 출혈은 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부검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진과 CT 결과만으로 사인을 결론 내릴 수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신이 화장됐다.’ 보험금 살인을 조사하는 경찰이 맞닥뜨리게 되는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다. 2010년 인천에서 발생한 이른바 ‘산낙지 살인사건’의 피고인에 대한 1심과 2심의 판결이 엇갈린 것도 근본적으로는 피해자의 시신이 사망 이틀 후 화장돼 직접적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2심 재판부는 올해 4월 여자친구를 살해한 뒤 산낙지를 먹다 숨이 막혀 숨진 것처럼 속여 보험금을 타낸 혐의로 기소된 김모 씨(32)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1심 판결을 깨고 살인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심폐기능이 정지됐을 당시 수사기관의 조사나 부검이 이뤄졌으면 사망 원인을 밝힐 수 있었는데 경찰은 타살 의혹이 없다고 보고 조사를 하지 않았다”며 “이 때문에 김 씨 진술 외에는 사망 원인을 밝힐 아무런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수상한 통화
증거가 더 필요했다. 정 경사는 평택의 한 여관에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본격적으로 주변 탐문에 나섰다. 한 씨를 아는 사람들은 “예전에 흔히 동네에서 볼 수 있었던 ‘바보’였다”고 입을 모았다. 한 씨가 다녔던 초등학교도 찾아갔다. 한 씨의 생활기록부에는 ‘부모가 일찍 죽었다’ ‘지능이 떨어지고 글씨를 못 쓴다’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인력사무소 사장 A 씨의 휴대전화 사용 기록도 살폈다. 사건이 발생한 날 오후 2시 30분경 인근의 다방 여종업원에게 전화한 사실이 확인됐다. 여종업원은 정 경사에게 “A 씨가 그날 농장으로 칡즙을 배달시켰다”고 말했다. 그리고 A 씨는 한 씨와 여종업원을 데리고 충남 아산만 방조제 인근의 조개구이 집에 가 소주 3병을 나눠 마셨다. 술자리는 다시 평택의 한 식당으로 이어졌고, 이곳에서 세 사람은 소주 4병을 마셨다. 이후 오후 7시경 A 씨는 한 씨를 농장에 내려주고 여종업원만 데리고 포장마차로 가 소주 3병을 더 마셨다.
“A 씨가 함께 술을 마시다 갑자기 누군가의 전화를 받더니 얼굴이 붉어지면서 황급히 나가더라고요.”(여종업원)
휴대전화 기록을 뒤졌다. 사고를 낸 B 씨와의 통화였다. 두 사람의 공모 정황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정 경사는 바로 검찰에 체포영장을 신청해 두 사람을 체포했다. B 씨는 “A 씨가 보험금을 받아 내 빚 6000만 원을 대신 갚아주겠다고 했다. 사고를 가장해 한 씨를 살해하기로 하고 각자 역할을 분담했다”고 자백했다. 현장검증이 이뤄지던 날 정 경사는 한 씨의 넋을 위로하며 그가 잠든 공터에 소주 한 잔을 따라 명태포와 함께 올려놨다.
A 씨가 보험회사에 한 씨의 사망보험금을 청구한 날짜는 2008년 5월 2일. 한 씨가 사망한 지 20일 만이었다. 보험금 살인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바로 보험금 청구 시점이 빠르다는 것이다.
무죄 판결에도 불구하고 ‘산낙지 살인사건’의 피고인 김 씨에 대해 의심 가는 이유 중 하나도 보험금 청구 시점이다. 피해자는 2010년 5월 5일 사망했다. 김 씨는 8일 뒤에 보험금을 청구해 7월 23일 자신 명의의 계좌로 2억51만 원을 송금 받았다.
징역 20년, 그리고 15년
다음 해 12월 24일 대법원은 A 씨에 대해 징역 20년, B 씨에 대해 징역 15년을 선고한 1심 판결을 확정했다. 3심까지 이어지는 재판 과정에서 두 사람의 변호인은 한 씨의 살인 혐의를 뒷받침할 직접증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형사재판에서 유죄로 인정하기 위한 심증형성은 반드시 직접증거에 의해 형성돼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간접증거에 의할 수도 있고 이때 간접증거는 모든 관점에서 상호 관련시켜 종합적으로 평가해 모순 없는 논증을 거쳐야 한다”며 경찰이 수집한 간접증거로 인정되는 사실들 사이에 모순이 없는 만큼 살인 등에 대한 두 사람의 범죄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보험금 살인에서 간접증거만으로 유죄를 인정한 의미 있는 판결이었다. A 씨는 한 씨를 죽이기 8개월 전에도 차에 한 씨를 태우고 가다 조수석 쪽으로 다리 교각을 들이받아 살인미수 혐의로 함께 처벌됐다.
한 씨는 정신지체 장애인이었지만 법적으로 장애인으로 등록되어 있지도 않았다. A 씨가 들고 다니던 명함에는 ‘모 장애인협회 평택시 안중지구 소장’이라는 직함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경찰이 확인한 결과 해당 장애인협회는 없는 단체였다. 처음부터 장애인 단체를 운영하는 것처럼 가장하기 위해 한 씨를 데리고 있었던 A 씨는 재판이 끝나는 날까지도 범행을 인정하지 않았다.
박희창·박훈상 기자 rambl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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