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경제 망친 이탈리아마리오 총리는 나라 구(救)하고 실비오 총리는 여자 구(求)했는데국민은 마리오를 버렸다국민 힘들게 하지만 옳은 지도자부와 성장 낳는 근면 검소… 21세기엔 설 자리가 없나
김순덕 논설위원
유럽연합(EU) 집행위원 출신의 이탈리아 전 총리 마리오 몬티(70)는 유능하고도 근면 성실한 것으로 이름난 남자다. 본인도 “경제학자 사이에서 나는 독일인으로 간주돼 왔다. 칭찬은 아니겠지만…” 하고 고백할 만큼, 밝고 화려한 라틴 기질과 거리가 멀다.
그는 2011년 11월 국가채무가 치솟고 신용등급이 뚝뚝 떨어져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떠맡아 경제개혁을 과감히 해낸 ‘슈퍼 마리오’였다. “이탈리아가 좀 지루한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는 그는 같이 살고 싶은 남자다. 지루할 순 있겠지만 또박또박 통장 불려 가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국가채무를 감당 못 하게 쌓아 올려 EU 압력에 쫓겨나다시피 했으면서도 그는 남유럽 태양처럼 언제나 짱짱했다. 2월 총선을 앞두고는 자기가 소유한 TV의 정치토크쇼에 나와 스물일곱 살짜리 새 애인을 어떻게 홀렸는지 떠벌려 남녀 시청자에게 꿈과 낭만을 선사했다.
그래도 그렇지, 미성년자와의 스캔들에 뇌물 횡령, 마피아 연루까지 23가지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정치인을 세 번이나 총리로 뽑아 준 이탈리아에 의문이 생겼다. 잠깐 놀기만 해야 할 남자와 살림 차렸다가 자식 세대까지 실업자로 만든 형국이다. 이번 총선에서도 나라를 구해 낸 마리오의 중도연합은 실비오의 중도우파연합(29.18%)의 절반(10.56%)도 표를 얻지 못했다.
의문은 벨기에에서 6월 내내 입고 다니던 경량 패딩 점퍼를 밀라노 공항에서 벗어 드는 순간 풀려 버렸다.
괴테는 이탈리아 밤이 독일 낮보다 밝다고 했다. 눈부신 햇살, 뜨거운 몸을 식혀 주는 달고 관능적인 아이스크림, “인생 별거 있나”(이탈리아 말로 치면 “돌체 비타”) 소리가 절로 나오는 요리를 온몸으로 체험하니 실비오가 손을 내밀면 팽그르르 탱고라도 출 것 같다.
수천 년 역사도 국민성에 작용했다.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이민족에게 당한 오랜 침략 때문에 이 나라에서 믿을 건 핏줄밖에 없다. 정직과 신뢰 같은 공적 미덕은 가족에게만 바칠 뿐이다. 비효율적 관료주의에 복종하는 척하면서 법과 제도를 외면해 ‘통치 불가능’이라는 오명까지 얻었다.
‘맘마 미아’를 쓴 이탈리아 언론인 베페 세베르그니니는 “실비오는 이런 이탈리아인의 본능과 약점을 파고드는 비범한 능력을 지녔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들 알림장에 숙제를 써 주고 간식비를 번 장사꾼 감각으로 정치판에 뛰어들어서는, 일흔이 넘어 섹스 스캔들까지 일으킨 실비오를 이 나라 사람들은 ‘그’가 아닌 ‘우리’로 본다는 거다.
실비오와는 딴판으로 정치적 좌고우면 없이 나라를 구하고도 국민에게 버림받은 마리오는 그래도 국익을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TV 프랑스24와의 인터뷰에선 “어떻게 지내느냐”는 질문에 “아주 잘 지낸다”며 “긴축재정이 인기 없다는 것은 잘 알지만 꼭 해야 하는 개혁이었고 쭉 계속돼야 한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마리오와 실비오는 이성 대 감정, 유능한 테크노크라트 대 포퓰리즘 정치인을 극명하게 대비해 준다. 르네상스 시대처럼 인간의 악한 면까지 인정하고 현세를 즐기는 라틴 문화의 상징 같은 인물이 실비오다. 국민 정서와 지도자의 배짱이 딱 맞았던 것이다.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유로 위기의 본질을 게르만 문명과 라틴 문명의 충돌로 분석했다. 잠자는 공주를 깨우려면 공공지출과 정치비용 감축, 노동유연성과 사법독립, 세제개혁 등 다섯 개의 대담한 키스가 필요하다는 연구보고서도 나왔다.
이탈리아 사람에게 “우리나라도요, 열정적이고 식구들 끔찍이 여기고…” 하다가 놀란 적이 있다. 남유럽 기질과 너무나 비슷하다는 걸 깨달아서다. 늦게나마 이탈리아에선 나라를 혼수상태에 빠뜨렸던 실비오를 단죄할 태세다. 우리나라에선 다 지난 정치논쟁을 또 하느라 나라를 혼수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그 소식이 더 짜증스러운 건 이탈리아에서 듣고 있어서인가.―밀라노에서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