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대~20대 초반 200명 심층 설문
박근혜 대통령은 17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하며 이같이 말했다. 박 대통령의 말을 전해 들은 국민도 북한의 주장과 궤를 같이하는 청소년들의 역사인식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고교생 3명 중 2명꼴로 6·25전쟁을 ‘남한이 일으킨 전쟁’으로 알고 있다면 2013년 대한민국은 왜곡된 역사관 속에 젊은이를 방치하는 한심한 국가라는 의미가 된다.
본보 취재팀은 6·25전쟁 발발 63년을 맞아 24일 전국의 10대와 20대 초반 청소년 200명을 무작위로 추출해 심층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취재팀은 또 이와 별개로 해양경찰청 관현악단 소속 20대 전경 20명에게 설문조사를 하고, 대학생 100명에게는 단체 카카오톡을 통해 6·25전쟁 발발 원인을 물어봤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응답자 전원이 ‘6·25전쟁은 북한이 남한을 침공해서 일어난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다만 ‘남침이냐 북침이냐’고 물었을 때는 ‘북침’이라고 대답한 청소년이 3명 중 1명꼴로 나왔다. 그렇게 대답한 청소년에게 북침의 의미를 묻자 이들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했으니 북침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지 않느냐”고 했다.
결과적으로 박 대통령이 충격이라고 표현한 언론사 조사에서 무려 69%가 6·25를 북침이라고 대답한 것은 남침과 북침이라는 표현을 혼동한 대답이 많았던 때문으로 추정된다. 박 대통령이 인용한 설문은 한 언론사가 입시전문업체와 함께 전국 고등학생 506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는데, 이 언론사는 ‘한국전쟁은 북침인가 남침인가’라고만 물었다. 결국 박 대통령은 용어의 혼동 때문에 빚어졌을 개연성이 큰 ‘69% 북침 대답’의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지 않은 채 우리 사회 청소년의 역사인식 왜곡을 보여 주는 조사 결과로 받아들인 것으로 분석된다.
본보 면접조사에서 6·25전쟁을 북침이라고 답한 서울의 직장인 김태원 씨(25)는 북침을 ‘남한이 북한을 침략한 것’이 아니라 ‘북쪽의 침략’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김 씨는 “먼저 침략을 한 쪽을 주어로 놓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북한이 침략을 했으니 북침이 맞다”고 답했다.
취업준비생 문인호 씨(29)는 “학교에서도 배우고 군대에서도 배웠는데 매번 북침이 ‘북한을 침략한 것’인지, ‘북한이 침략한 것’을 뜻하는지 헷갈린다”고 했다. 강원 춘천의 초등학교 5학년 조경민 군(12)은 “북침인지, 남침인지 착각했지만 전쟁은 북한이 일으킨 게 맞다. 친구들도 모두 잘 알고 있다”고 했다.
호남대 2학년 김민수 씨(23)는 “학창시절엔 남침으로 배웠지만 질문을 받는 순간 헷갈렸다”며 “주어를 누구로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달리 해석될 수 있는 만큼 용어를 명확하게 정리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언어를 줄여 쓰는 젊은이의 언어 습관도 혼란을 키우는 데 한몫했다. 재수생 김모 씨(19·여)는 “‘열심히 공부한다’를 줄여 ‘열공’이라고 쓰듯 북한이 침략했으니 북침이 자연스럽다”며 “친구들과 6·25전쟁을 이야기할 때 자연스럽게 북침으로 표현한다”고 말했다.
조광 고려대 한국사학과 명예교수는 “북침과 남침은 반공교육을 받은 기성세대에게는 일반명사처럼 써 온 말이지만 청소년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아 의미가 정확히 전달되지 않는 것”이라며 “북침과 남침이란 단어의 뜻을 풀어 여론조사를 하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했다.
북침 남침 표현에 대해 많은 이가 헷갈려 하는 현상은 지난 10여 년간 우리 사회가 겪어온 이념적 혼란의 결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1980년대 중반 이래 수정주의 사관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확산됐다. 특히 중고교에서 좌파적 시각을 가진 일부 교사의 영향으로 6·25전쟁을 어느 일방의 침공에 의한 전쟁이 아닌, ‘남북한 간의 국지전적 무력 충돌이 확전된 내전’ 또는 ‘미국이 북한의 공격을 유도한 전쟁’ 등으로 배운 학생이 늘어났다. 좌파적 역사관이 교단에서 횡행하던 시기에 북침 남침 등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표현 자체가 지닌 의미도 퇴색하는 현상이 벌어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6·25전쟁 발발 원인에 대한 좌파의 왜곡은 1990년대 들어 옛 소련의 비밀문서들이 공개되면서 학술적으로 더는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 그 결과 최근엔 중고교 교단에서 북침을 가르치는 극단적인 좌파 교사의 행태가 거의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북침, 남침 등의 표현을 낯설어하고 혼동하는 현상은 계속되고 있다.
젊은 세대가 한자(漢字)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이제는 교과서는 물론이고 언론이나 공공기관이 ‘남침’ ‘북침’ 같은 줄임말의 사용을 지양하고 정확하게 ‘북한의 침공으로 일어난 전쟁’ 식으로 풀어 써야 한다고 지적한다. 만약 두 음절의 약어를 불가피하게 사용한다면 술어 다음에 목적어를 쓰는 일반적 한자어법에 따라 ‘침남(侵南)’으로 바꿔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역사 교과서도 더욱 친절하게 집필할 필요가 있다. 2011년 교육과학기술부(현 교육부)는 ‘새 역사교과서 집필 기준’을 발표하고 6·25전쟁의 개전에 있어 북한의 불법 남침을 명확히 밝혔다. 본보가 24일 시중에 나와 있는 고교 한국사 교과서 6종을 확인한 결과 “북한이 남침을 감행했다”, “인민군의 남침” 등의 표현을 통해 전쟁 발발 책임이 북한에 있음을 명확히 기술해 놓았다. 하지만 ‘북침’이라는 표현이 무슨 뜻인지, 이 표현이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를 설명해 놓은 교과서는 없었다.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는 “교과서를 집필하는 사람들이 헷갈려 하는 학생들을 고려하지 않고 만든 것이 문제다”라며 “교과서에서 남침이나 북침으로만 표현하지 말고 ‘북한이 남한을 공격했다’는 식으로 이해하기 쉽게 쓴다면 학생들의 혼란도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북침(北侵): (남쪽이) ‘북쪽을 침략한다’는 의미.
남침(南侵): (북쪽이) ‘남쪽을 침략한다’는 의미. 6·25전쟁의 경우가 들어맞는다.
수정주의: 6·25전쟁의 기원에 관한 학설 중 ‘남한과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설. ‘남침유도설’로도 불린다. 대표적인 학자는 미국 브루스 커밍스 교수로, 1981년 펴낸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주장했지만 1990년대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자료에 의해 허위임이 드러났다. 그는 최근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남침유도설을 말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박훈상·이권효·서동일 기자 tigerma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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